‘상폐빔’ 통해 단기 고수익 노려
막대한 수수료 수익 올린 거래소
잡코인 정리로 건전성 제고 효과
올 상반기에만 국내 4대 가상자산(가상화폐) 거래소에서 약 52개의 코인이 사라졌다. 6월 거래소가 갑작스럽게 일부 상품의 거래 종료를 알리며 이날 3조3000억 원에 달하는 시가총액이 한순간에 증발한 것으로 추정된다. 가상자산에 한 사람당 평균 1000만 원을 투자하고 있다고 가정(사람인 조사)하면 30만 명이 넘는 사람의 투자금이 증발한 셈이다. 보통의 증권시장이었다면 꽤 큰 논란이 불거졌을 일이지만, 가상자산 시장에선 ‘쉬쉬’하는 분위기가 역력하다.
이 같은 현상에 대해 가상자산 시장에 관계된 코인 ‘투자자·거래소·규제당국’ 모두 상장폐지가 ‘이득’이 됐기 때문이라는 분석이다. 상장폐지는 투자자들에게는 단기간의 고수익을, 거래소에는 건전성을 제고할 수 있는 기회로 인식됐다. 금융당국은 그저 선을 긋고 지켜보기만 할 뿐이었다.
가상자산에 투자한 이들은 ‘상폐빔’에 대한 기대를 숨기지 않았다. 700만 원가량 가상자산에 투자 중인 20대 직장인 이상명(가명) 씨는 “몇 달째 묶여 있었는데 차라리 상폐가 결정되면 ‘상폐빔’이라도 기대해볼 수 있으니 차라리 상폐가 됐으면 좋겠다”고 했다. 사실상 상장폐지도 일종의 ‘호재’로 작용하는 것이다.
람다(LAMB) 상장폐지를 틈타 수익을 냈다는 이진성(가명) 씨도 “코인의 가치나 미래에 대해 큰 생각을 한다기보다, 돈 복사가 얼마나 되냐에 눈에 불을 켜고 달려드는 듯하다”며 “상장폐지도 여기에 영향을 미치는 이벤트 중 하나일 뿐”이라고 말했다.
‘상폐’ 코인에 대해선 단순히 각자의 책임으로 돌리는 분위기가 자리 잡았다. 또 다른 30대 가상자산 투자자는 “어차피 비트코인을 빼면 사실상 도박에 가까운데 상폐되면서 돈을 잃었다고 얘기하는 게 무슨 의미가 있나”라고 지적했다. 상장폐지도 일종의 단기 수익을 낼 수 있는 하나의 전략으로 통용되면서 거래소의 ‘묻지마 상폐’ 결정에도 ‘선의의 피해자’가 들어설 자리가 없는 것이다.
일부에겐 단기 수익을 크게 거둘 수 있는 투기의 기회를, 일부에겐 기회를 쟁취하지 못한 열패감을 안긴다. 수요자들 사이에서도 상장폐지를 보는 시각이 극명하게 갈리다 보니 이를 공론화해 문제 제기할 동력도 생기지 않는다. 오히려 주요 가상자산 커뮤니티에서는 ‘상장폐지 가능 코인’이라며 상장폐지 예측에 대한 정보가 오가기도 한다.
거래소도 상장폐지를 통해 시장 건전성을 담보할 수 있다는 계산이다. 그간 가상자산 거래소들은 150개가 넘는 코인들을 무더기로 상장하고 이로 인한 거래 수수료를 거둬왔다. 빗썸의 운영사 빗썸코리아는 2021년 1분기 매출액 2502억 원, 당기순이익 2225억 원으로 역대 최대 실적을 기록했다. 전체 매출 대비 수수료 수입 비율은 98%에 달한다.
업비트 운영사 두나무 역시 구체적 실적을 밝히고 있진 않으나, 국내 거래 점유율의 70%를 차지하고 있는 만큼 1분기 영업이익만 4000억~5000억 원을 거뒀을 것으로 추산됐다. 업계 관계자는 “이미 수수료는 거둔 상황에서 잡코인 정리는 이미지 개선 효과도 존재하고 이를 통해 메이저 코인에 거래량이 이동하는 효과도 볼 수 있다”고 말했다.
최수혁 한국블록체인스타트업협회 대표는 “상장 기준에 대한 불투명성은 큰 문제다. 거래소마다 다르고 상장피를 받았느냐에 대한 논란도 여기에서 비롯된 것”이라며 “상장을 했는데 상장의 퇴출 기준도 되게 모호하다는 생각도 든다. 받을 때 제대로 된 걸 받았으면 퇴출할 때도 어렵지 않나”라고 말했다.
잡코인을 정리한 배경에는 그간 진입장벽을 두지 않고 무작정 상장한 사실을 감추기 위함이라는 해석도 나온다. 정수호 변호사는 “실제로 한국 법인이 운영하는 거래소가 편법적으로 해외에서 상장하기도 하고, 이로 인해 과세당국에 포착돼 수사 선상에 오르는 경우가 있다”며 “가상자산 거래소들이 잡코인을 정리하는 이면에는 혹시나 불미스러운 일이 연루됐을 때 적절한 검토 없이 상장한 내용도 드러날 수 있다”고 말했다. 김형중 고려대 정보보호대학원 교수는 “부도덕한 이들이 거래소를 만들어 먹튀하는 경우가 있다. 이것은 분명히 문제이나, 전반적으로 거래소들은 잘 운영하고 있다”며 “단지 거래소의 기준에 대해선 정부가 미리 정해놨으면 한다”고 말했다.
기준 없는 상장폐지 결정이 가상자산 시장에 계속 호재로 작용할 수 있을지에 대해선 의견이 갈린다. 기준 없는 상장폐지가 작전 세력의 먹잇감이 되기 좋기 때문이다. 최근 아프리카TV 플랫폼에서 유명 BJ들이 비상장 코인에 투자하고 일반 투자자로부터 자금을 모은 뒤 자신들은 투자금을 회수해 이익을 얻는 ‘선취매’ 의혹이 불거진 바 있다. 내부자를 제외하면 이를 공론화하기 어려운 구조를 갖기에 향후 이러한 문제가 반복해서 발생할 수 있는 문제도 남아 있다.
금융당국으로서는 이와 관련해 사전에 개입할 근거도 의지도 없는 상황이다. 은성수 금융위원장은 대정부질문에서 일론 머스크가 비트코인과 도지코인 등 가상자산을 언급하면서 시장에 영향을 주는 것에 대한 손해배상 청구 가능성을 묻는 질문에 “분노는 치솟지만, 현실적으로는 (어렵다)”며 “머스크가 장난을 쳤을 때 국내에서 그것을 했다면, 주식이었다면 사법처리를 받는 것”이라고 말했다. 사실상 상장폐지를 두고 사기 행위가 나와도 책임자를 규명할 수 없다는 의미다.
상장폐지가 무더기로 이어진 직후 가상자산 시장을 두고 ‘투기판’이라는 비난의 목소리가 더욱 거세다. 점차 가상자산 시장 전체에 대한 혐오로 이어졌다. 이로 인해 가상자산이 앞으로 제공할 긍정적인 효과들도 ‘세력 투기’란 자극적인 것들에 가려지고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최수혁 대표는 “(가상자산과 관련된 시장에 진입한) 스타트업들이 굉장히 어렵다”며 “정부가 이렇게 대응하면 시장에 진입해서 할 방법이 없다. 할 수 있는 것들이 거의 없기 때문이다. 활로를 찾기 어려울 것”이라고 말했다. 아울러 “이 시장은 융합산업이다. 여러 부처가 같이 개입을 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고 가장 중요한 부분은 금융자산의 관점에서 살펴보면 제일 중요한 부분은 금융위가 전향적으로 해야 한다”고 말했다.
김형중 교수는 “지금 코인에 대해서 극단적인 혐오감을 보이는 사람들이 있다. 그런데 사실 다 개인의 선호가 다르고 시장도 커지고 있다”며 “블록체인 산업과 가상자산 산업을 분리해서 생각할 필요는 없다”고 부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