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중 관계가 악화되기 이전 세계 경제는 ‘글로벌 공급망(global supply chain)’이라는 개념보다는 ‘글로벌 가치사슬(GVC, global value chain)’이라는 개념에 주목했고 이를 토대로 세계 경제를 주로 분석해 왔다. 그러나 2021년 현재 세계 경제를 이해하고 전망하는 데 가장 중요한 개념은 ‘글로벌 공급망’이다.
사전적으로 가치사슬(value chain) 개념이 제품 생산에 있어서 공정별로 누가 얼마만큼의 부가가치를 가져가는지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면, 공급망(supply chain)이란 개념은 제품이 차질 없이 생산되어 소비자에게까지 제때 원하는 만큼 공급이 되는지 제품 생산의 전체적 흐름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가치사슬은 근본적으로 경제적 개념이고 공급망은 정책적 개념이다. 가치사슬에서는 높은 곳으로 올라갈수록 경제적으로 더 큰 이득을 취할 수 있기 때문에 높이 올라가는 것이 목표가 되지만, 공급망은 올라가거나 내려가는 것이 아닌 안정화가 목적이며, 공급망의 안정화는 경제적 비효율성을 동반한다.
미국은 그간 글로벌 가치사슬에서 높은 위상의 영유를 목표로 해 왔다. 미국은 끊임없이 경제적 효율성을 추구해 왔으며 부가가치가 높은 제품 설계 및 개발에 특화하고 부가가치가 낮은 제조를 등한시했다. 그러나 그래 왔던 미국이 이번 공급망 조사 보고서를 통해 경제적 효율성만을 추구한 데 대한 자기반성을 보였다. 보고서에서는 미국의 △국내 제조 역량 부재 △질적 성장을 위한 인센티브 제공 부족 △미국 정부의 산업정책 부재 등을 문제점으로 지적하고 있다. 산업정책에 있어서 기존의 제한된 정부의 역할과 비교우위에 입각한 철저한 분업화가 오히려 미·중 간 전략적 경쟁 국면을 맞이해서는 공급망상의 리스크로 작용했다는 문제의식이다.
즉 공급망에 대한 강조는 신뢰할 수 없는 특정 국가에 대한 공급망상의 의존도와 그에 따른 국가안보에 대한 우려에 그 근본적인 배경이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렇다면 이번 보고서에 근거한 향후 글로벌 공급망 재편은 어떤 양상을 띨까.
첫째, 공급망의 무기화는 불가능할 것이다. 이번 보고서에서도 나타나듯이 주요 품목에 있어서 국가 간 상호 의존도는 생각 이상으로 높은 것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어느 한 국가가 공급망을 이용하여 일방적으로 다른 국가를 공격하는 것은 불가능할 것이다. 공격을 받은 국가가 동일 제품의 생산공정상 다른 지점에서 보복할 수 있고, 또는 다른 전략물자의 수출통제로 보복도 가능하기 때문이다.
둘째, 미국의 공급망 재편은 결과적으로는 중국 의존도 줄이기가 될 것으로 보이지만, 직접적인 대중국 제재는 아니다. 예를 들어, 중국의 공급망상 위상이 약한 반도체의 경우는 최첨단 반도체 생산에 있어 대만 의존도를 줄이기 위한 방안들이 제안되었다. 앞으로도 대중 제재는 중국의 특정 첨단기술 기업을 대상으로 한 수출통제, 수입제재, 투자제재, 금융제재 등의 형식으로 지속될 것으로 보인다.
셋째, 공급망 재편은 단기적으로 우리의 해외시장 진출 및 확대의 기회가 될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각국의 공급망 다변화 전략을 활용하고 첨단기술 발전과 기후변화 등으로 변화하는 미래 수요시장을 선점하기 위한 신속하고 적극적인 해외시장 진출이 중요하다. 그러나 각국이 경쟁적으로 자체 공급망 구축에 나선 가운데 장기적으로는 무한경쟁으로 돌입하며 현재 비교우위에 있는 우리 산업의 경쟁력 유지에 도전이 될 가능성도 있다. 결국 연구개발(R&D)을 통한 공급망상의 병목지점(choke-point) 또는 핵심기술 확보가 중요하다.
넷째, 제조 역량 유지의 중요성에 대한 재확인이다. 중국이 제조 면에서 우리를 추격한다고 해서 과거 일본이 그랬던 것처럼 우리도 고부가가치 핵심 소재·부품·장비 산업만 육성해서는 안 된다. 이번 백악관 보고서에서 지적한 것이 바로 제조 역량의 부재에 대한 반성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 동일한 최첨단 장비와 고순도 소재를 갖고도 TSMC, 삼성, 인텔이 다른 기술 수준의 반도체를 생산하고 있다는 것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바로 제조 노하우의 축적이 결정적인 차이를 만들 수도 있다는 점이다.
세계 경제는 대변혁의 변곡점에 선 느낌이다. 그리고 주요국들은 모두 새로운 전략 짜기에 여념이 없어 보인다. 우리도 기존의 패러다임에서 벗어난 새로운 전략 짜기에 돌입해야 하며, 지속가능한 성장을 위한 신속하고도 치밀한 전략 구축이 요구되는 시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