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의 길은 각종 사회, 경제, 제도상 위험의 해결 주체를 개인으로 규정한다. 다만 국가는 개인이 노동시장과 사회에서 경쟁력을 갖추도록 지원해 주는 역할로 한정한다. 마치 부모가 자녀와 인격적·감정적 교류 없이 좋은 책상, 침대, 공부방만 마련해 주면 부모로서의 역할은 다 끝났다고 하는 것과 같다. 교육·훈련을 통해 노동시장 내 개인의 경쟁력 확보가 가능하다는 주장은 양질의 일자리 수요 창출 대책은 도외시한 채 구직을 염원하는 이들을 대상으로 한 희망고문이자 상징적 폭력이기까지 한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 지난해 초 우리나라는 전국민고용보험 정책을 발표하였다. 고용보험은 유럽에서 노동조합의 실업공제기금으로 시작되었다. 재정문제로 제대로 된 실업급여가 제공되지 못하자 스위스를 필두로 공제기금을 국가가 보조하기 시작하였다. 현재 우리나라에서 국가 재정보조금 없이 실시간 소득 파악과 납입 대상 확대를 통해 고용보험에 사회보장 역할을 맡기겠다는 발상은 무척 흥미롭기까지 하다. 사회보험은 세대 간 직종 간 연대와 신뢰가 없으면 지속되기 어렵다. 현재 고용보험은 반복실업, 재정확충, 그리고 세계 2위의 로봇대체율로 인한 절대적 고용자 수 감소 등 재정을 열악하게 하는 요인에 둘러싸여 있다. 이 점이 빈번한 반복실업에 노출된 플랫폼 노동자들과 자영업자들에게 고용보험이 얼마나 유용한 사회보험이 되게 할지 단정하기 어렵게 만든다.
오늘날 기본소득은 고용보험의 대안으로 일각에서 제기된다. 기본소득에 대한 비판과 논의는 무수히 많지만 사회적 기여와 참여 그리고 공동체 간 소통에 대한 논의는 전무하다. 기본소득은 로빈슨 크루소가 불편함 없이 섬에서 혼자 살게 할 수는 있어도 프라이데이를 만나게 해 주지는 않는다. 말리부 해변가에서 서핑을 즐기는 서퍼에게까지 왜 돈을 주어야 하느냐는 호혜주의로부터 기본소득은 자유롭지 못하다.
대안으로 영국의 앤서니 앳킨슨(Anthony B. Atkinson)은 1990년 초반 기본소득과 적극적 노동시장 정책 중간쯤에 위치하는 참여소득을 제안하였다. 사회적 기여자에게 자산조사를 하지 않고 현금을 지급하는 방식이다. 참여소득은 참여와 사회적 기여를 무엇으로 정의할지 모호함 때문에 비판을 받는다. 하지만 지난 500년 동안 비판을 받아 온 기본소득에 비하면 30년밖에 안 된 참여소득은 개선의 여지가 충분하다.
오늘날 참여소득에 주목해야 할 지점은 개인화가 만연된 이 사회에서 다양한 구성원들이 정체성을 찾을 공동체의 따스한 공간이 여전히 필요하다는 사실이다. 자신의 영광만을 위해 가족을 등진 자식이 실패하고 돌아와도 넉넉한 마음으로 받아주는 부모와 같은 따스한 마음 말이다. 참여소득은 지역적으로 다양한 사람들이 서로 이해하고 의견을 존중하며 무엇을 참여소득으로 할지 스스로 결정하게 한다. 참여소득은 우리 모두를 위해서 내가 나서는 것을 전혀 어색하지 않게 해 주며, 나의 목소리를 낼 공간이자 공동체 사회에 재능을 펼칠 기회의 장이 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