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재 비트코인 등의 가상화폐는 암호화폐, 전자화폐 등 여러 용어가 혼재돼 사용된다. 이는 가상화폐를 하나로 묶는 법률적 용어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유일하게 가상화폐를 담는 법이 ‘특금법(특정 금융거래정보의 보고 및 이용 등에 관한 법률)’이지만, 이 역시도 가상화폐가 테러자금으로 사용되는 최악의 상황을 막기 위해 존재한다는 점에서 가상화폐는 여전히 ‘법의 사각지대’에 존재한다.
법원도 가상화폐의 정체성을 규정하지 못했다. 서울중앙지법의 지난 2018년 12월 가상화폐 거래소 손해배상소송 판결에 따르면 가상화폐가 ‘전자화폐’ 혹은 ‘전자지급수단’인지 다투는 사안에서 법원은 두 가지 전부를 인정하지 않았다.
전자화폐는 은행권이나 주화 등의 실물화폐가 단순히 온라인상에서 대금 결제 수단으로 존재하는 것을 의미한다. 가령 지자체가 발행하는 각 지역화폐가 대표적인 전자화폐다. 지역화폐는 현금과 1대1로 교환되며, 언제든지 현금으로 교환할 수 있다. 하지만 비트코인은 현금과 동일한 가치로 교환돼 발행되지 않는다. 이 때문에 가상화폐는 전자화폐로 보지 않는다.
전자지급수단은 전자화폐와 범용성·환급성 등에서 차이가 있다. 쉽게 말해 전자화폐는 어디서든 사용될 수 있는 반면 전자지급수단은 정해진 업종에서만 사용할 수 있다. 전자화폐는 큰 범주에서 전자지급수단을 포괄한다. 하지만 법원은 비트코인 등 가상화폐가 ‘지급수단’이 될 수 없다며 전자지급수단으로도 인정하지 않았다. 말 그래도 비트코인이 물건을 살 때 화폐가 될 수 없다는 뜻이었다.
가상화폐가 전자화폐도 전자지급수단도 아닌 무법지대에 놓인 이유다. 이로써 가상화폐의 ‘이용자’는 법률적 보호를 받지 못한다. 법률적 보호의 근거는 해당 용어를 정확하게 특정할 수 있느냐에 따라 달라진다.
가상화폐를 규정하지 못하는 것은 단순히 비트코인의 문제만은 아니다. 게임 내에서 발행되는 게임머니나 사이버캐시, 영화사가 제공하는 포인트, 마일리지 등 전자지급수단과 유사한 일종의 ‘대안화폐’에서도 마찬가지의 문제가 나타난다.
대안화폐는 디지털콘텐츠 업체는 물론 게임사까지 발행하고 있다. 해당 시장 규모가 성장하는 가운데 콘텐츠 이용자는 대안화폐를 금전과 비슷한 가치의 재화로 인식한다. 대표적인 시장이 ‘게임머니’다. 게임머니는 게임사의 자체 이용약관에 따르면 현금으로 교환할 수 없지만, 실제로는 사설 온라인 거래소를 통해 활발하게 환전된다. 온라인 뱅킹을 통해 외국 화폐를 교환하는 것처럼 쉽고 빠르다.
사실상 게임머니는 현금과 다르지 않게 사용된다. 그런데도 여전히 법률적 분쟁에선 게임화폐 사용자의 보호는 미비하다. 김승환 변호는 “게임 내 재화는 게임사의 약관에 있는 ‘정의규정’에 의존하고 있고 구체적인 법률상 용어는 제정되지 않았다”며 “이 경우 재화의 범위가 모호하기에 여기부터 분쟁이 생길 수 있다”고 말했다.
실제로 대안화폐를 발급하는 측면에도 차이가 존재한다. 비트코인이 만약 전자지급수단이나 전자화폐의 구분 아래에 존재했다면 발행권의 액수를 규제할 수 있었다. 전자지급수단이나 전자화폐는 발행의 최고한도가 규제되고, 발행의 등록 및 허가를 요구한다. 반면 비트코인을 비롯한 대안화폐는 발행자가 자의적으로 유통을 결정할 수 있는 구조다.
이 때문에 게임머니나 가상화폐 등 대안화폐의 법률적 용어를 명확하게 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입을 모은다. 그래야 이용자의 보호뿐 아니라, 대안화폐 제공자에 대한 규제가 가능하다는 것이다. 김 변호사는 “정의규정이 생기면 그 정의규정을 통해 다른 법률의 적용을 받을 수 있는 가능성도 있다”며 “정의가 어떻게 내려지느냐에 따라 소비자를 보호할 수 있는 길이 열릴 가능성도 있다고 보인다”고 부연했다.
조장우 박사(영남대학교 법학연구소)는 ‘사이버머니의 민사적 법률관계에 관한 연구’에서 “다양한 유형의 사이버머니와 이해당사자를 유형별로 정의하고, 이들의 권리·의무에 관해 직접 규율해 사적화폐로서 사이버머니의 신뢰성과 안정성을 제고할 필요가 있다”고 지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