규제없는 적금계좌 수십개 만들어
단종 중고물품 파는 것처럼 현혹
돈 이체 받으면 통장 해지해 인출
1607, 1623, 1649, 1652, 1665, 1678, 1681, 1694, 1719, 1722, 1748, 1751, 1764, 1780, 1818, 1821, 1834, 1889, 1946, 1975.
최근 인터넷 중고거래 사이트 ‘중고나라’에서 허위 매물로 사기 행각에 벌인 A씨의 통장 계좌번호 끝 4자리다.해당 계좌번호 은행은 동일하고 계좌번호 앞 10자리가 모두 같다. A씨는 허위 매물을 등록하고 여러 계좌번호를 사용하면서 피해자들의 의심을 피해갔다. A씨로 인한 피해자는 100명 남짓, 피해액은 2000만 원을 넘어섰다. A씨는 오늘도 ‘단기간 다수계좌 개설 제한’ 제도의 맹점을 이용해 새로운 먹잇감을 노리고 있다. 금융감독원이 대포통장과 보이스피싱 근절을 위해 지난 2011년 도입한 이 제도는 20영업일 이내 2개 이상 계좌개설을 제한한다. 20영업일은 약 1개월로 ‘1개월 1계좌 규제’라고도 불린다. 그러나 입출금이 자유로운 통장만이 대상이다. A씨는 제도 밖에 있는 ‘적금통장’ 개설로 제도의 허점을 노린 것이다.
9일 이투데이 취재에 따르면 A씨는 지난 1월 30일부터 ‘중고나라’에 물건을 판매한다는 게시물을 올린 후 물건을 보내지 않는 방법으로 부당한 수익을 챙기고 있다. 그는 단종된 물건, 구체적인 지식이 있지 않으면 설명하기 힘든 물건 등을 위주로 판매 등록을 했다. 피해자들은 A씨의 수법이 치밀해 사기범죄에 고스란히 노출됐다고 입을 모았다. 평소 중고 거래를 하지 않는 사람도 단종된 물건을 구하려면 중고 거래를 이용 할 수밖에 없는 상황을 노렸다. 예컨대 낚시 릴 등 실제 사용하지 않으면 상품 설명하기 어려운 품목 위주로 피해자들을 현혹했다.
A씨는 특정 ㄱ은행 계좌로 피해자들에게 돈을 갈취했다. 범죄에 이용된 24개의 계좌 중 20개가 모두 ㄱ은행이다. ㄱ은행의 계좌번호는 지점 코드와 상품 종류 등에 따라 부여되는데 범죄에 사용된 계좌번호는 부산 소재 출장소에서 개설된 적금통장이었다. 사기에 동원된 계좌번호 앞 10자리가 모두 동일하고 서두에서 밝힌 끝 4자리만 달랐다. 이에 대해 ㄱ은행 관계자는 “(적금통장을 한 지점에서) 단기간에 개설하는 경우 그럴 가능성이 있다”고 설명했다.
단기간 다수계좌 개설 제한 제도는 개인이 2개 이상의 계좌를 개설할 경우 1개의 계좌를 개설하고 20영업일 뒤에야 2번째 계좌를 만들 수 있는 것이 골자다. 하지만 이 제도는 입출금이 자유로워 사기에 악용될 개연성이 높은 예금 성격 계좌만 대상이다. 적금은 돈을 찾으려면 해지해야 하는 구조라 사기로 이용될 가능성이 작다는 이유로 이 제도의 대상에서 제외됐다.
이 탓에 적금은 하루에도 여러 개의 통장을 만들 수 있게 됐다. 또 다른 가해자 B씨와 C씨 역시 ㄴ은행에서 여러 개의 적금 계좌를 개설해 중고나라 사기범죄에 활용했다. B씨는 37명에게 1992만 원, C씨는 2명에서 72만 원을 받아 챙기고 약속한 물건은 보내지 않았다. 이들은 이런 제도의 빈틈을 교묘히 파고들어 여러 개의 적금 통장을 만들고 100명이 넘는 피해자로부터 수십만 원씩 받아 모은 약 4500만 원을 돌려주지 않고 있다.
금감원 관계자는 사실상 적금을 단기간 다수 계좌 개설 제한 제도로 포함할지에 대한 논의는 없었다고 했다. 이 관계자는 “문제(적금을 이용한 사기 등)가 생기면 살펴볼 것”이라면서도 “적금은 재산을 축적하는 거라 전 국민에게 일괄적으로 (예금처럼 20영업일당 1계좌 개설로) 제한하면 파급효과가 클 것”이라고 우려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