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명권자인 문재인 대통령을 상대로 소송전도 불사하며 버티던 윤석열 검찰총장이 사퇴했다. 2019년 7월 부임한 지 1년 8개월 만이자 임기를 4개월 남겨둔 시점에 전격적인 결정이다.
방아쇠는 중대범죄수사청(중수청)이다. 검경 수사권 조정과 고위공직자범죄수사처 설치 등 계속된 검찰권 축소와 징계 사태 속에서도 직을 지켜왔지만 이번에는 "법치주의를 지키려 한다"며 물러났다.
윤 총장은 4일 '검찰 가족께 드리는 글'이라는 인사글을 통해 "검찰의 수사권 폐지와 중대범죄수사청 설치는 검찰개혁이 아니다"며 "대한민국 법치주의를 심각히 훼손하는 것"이라고 비판했다.
이어 "이제 우리나라의 민주주의와 법치주의를 지키기 위해 헌법이 부여한 마지막 책무를 이행하려고 한다"며 "검찰총장의 직을 내려놓는다"고 밝혔다.
윤 총장이 사퇴하면서 향후 정치 행보를 명시적으로 표현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최근 공개적으로 '민주주의 수호', '국민'을 반복적으로 언급한 만큼 정치 입문을 염두에 둔 포석이 아니냐는 해석이 나온다. 향후 정국은 한 치 앞을 내다볼 수 없게 됐다.
윤 총장은 중수청에 상당한 반감을 표시했다.
윤 총장은 전날 대구고검ㆍ지검 방문길에 "지금 진행 중인 '검수완박'(검찰 수사권 완전 박탈)은 부패를 완전히 판치게 하는 '부패완판'"이라며 여권의 중대범죄수사청(중수청) 설치 추진을 맹비난했다.
이날 인사글을 통해서도 중수처 설치 입법 추진에 대해 무거운 책임감을 느낀다고 밝혔다.
윤 총장은 "수사는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 재판을 위한 준비 활동"이라며 "수사와 기소는 성질상 분리할 수 없다"고 못 박았다.
그러면서 "정치, 경제, 사회 각 분야에서 힘을 가진 사람이 저지른 중대범죄에 대해서는 검찰이 직접 수사해서 소추 여부를 결정하고 최종심 공소유지까지 담당해야 한다"며 "나날이 지능화, 조직화, 대형화돼 가는 중대범죄에 대응하기 위해 수사·기소를 하나로 융합해 나가는 것이 세계적인 추세"라고 설명했다.
윤 총장은 "검찰 수사권이 완전히 박탈되고 검찰이 해체되면 70여 년이나 축적돼 온 국민의 자산은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특권층의 치외법권 영역이 발생해 결과적으로 국민들이 피해를 입게 된다"고 재차 강조했다.
법조계에서는 윤 총장이 사퇴를 결심한 시기가 절묘했다는 평가가 나온다.
차장검사 출신 변호사는 “사실상 윤 총장으로서는 지금 사퇴하는 게 적기다”라며 “추미애 전 법무부 장관과 갈등할 때 나갔으면 밀려나는 모양새라 보기에 좋지 않았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어 “대권에 도전한다는 가정하에 그런 모습은 도움될 게 전혀 없다”면서 “지금은 윤 총장이 검찰 조직을 위해 스스로를 불사른다는 인상을 줄 수 있다”고 설명했다.
정치평론가인 강신업 변호사는 “(윤 총장 사퇴) 이유는 중수청 등에 반발하는 것이지만 이를 명분으로 대권에 도전하겠다는 뜻으로 보인다”며 “전날 이른바 ‘대구 선언’을 하면서 현 정권에 각을 세우고 대선 출정식을 한 거나 마찬가지”라고 평가했다.
그는 윤 총장이 일선청 순방 일정을 재개 장소를 대구로 선택한 것도 정치권 진출 의사가 담겼다고 봤다.
여권은 윤 총장 사퇴로 중수청 설치를 밀어붙이기 힘들어졌다. 강행할 경우 윤 총장에게 정치적으로 힘이 실릴 수 있기 때문이다.
검찰 외부에서도 중수청에 대한 비판 여론이 거세지는 점도 부담이다. 이날 대한변호사협회는 “정치권의 이해관계에 따라 수사기관을 설치하는 것은 국민의 기본적 권익 보호에 부합하지 않으며 비리 척결과 정의 실현에도 반하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이어 “검찰의 수사권을 완전히 박탈하는 것을 골자로 하는 중수청 설치 법안은 중대범죄 수사능력을 약화시켜 권력에 대한 견제기능을 잠식할 것”이라며 반대 입장을 분명히 했다.
한편 박범계 법무부 장관은 윤 총장의 사직서를 제출받은 뒤 "사의 표명 소식을 접해 안타까운 마음"이라고 밝혔다. 박 장관은 정해진 절차에 따라 문재인 대통령에게 윤 총장의 사직 의사를 보고했다.
문 대통령은 윤 총장이 사직 의사를 표명한 지 한 시간여 만에 수용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