빙판이 미끄러운 건 얼음 표면에 형성된 얇은 수막 때문이다. 대부분의 경우 빙상 온도는 물의 어는점 혹은 얼음의 녹는점이라 알려진 0℃보다 훨씬 낮다. 그런데 어떻게 이 온도에서 얼음 표면에 물이 있을 수 있는 걸까? 이에 대해 ‘빙판을 누르는 압력으로 얼음이 녹기 때문’이라는 설명이 있다. 얼음의 녹는점이 0℃인 건 압력이 1기압일 때이고, 압력이 커지면 0℃보다 더 낮은 온도에서도 얼음이 녹아 물로 변할 수 있다. 스케이트화는 빙판에 닿는 면적이 일반 신발에 비해 좁기 때문에 이를 신고 얼음판에 서면 대기압의 수백 배에 달하는 압력을 가하는 것과 같고 따라서 녹는점이 낮아지는 게 사실이지만, 영하 10℃ 이하의 환경에서 얼음이 녹으려면 이보다 훨씬 큰 2000기압 이상의 압력이 필요하다. 결국 스케이트 선수 체중이 수백 ㎏을 넘어도 얼음 표면이 녹는 효과를 기대하긴 어려워 이 이론은 잘못된 것으로 받아들여진다. 이를 보완하기 위한 ‘마찰열 이론’도 있다. 즉 스케이트나 스키 선수가 눈이나 얼음 위를 활주하면 마찰이 생기는데, 이때 생기는 열이 얼음 표면을 녹이고 이 물이 얼음과의 마찰을 줄여 스케이트 날이 자연스럽게 미끄러지도록 도와준다는 이론이다. 이 이론대로면 스케이트 날이 사포처럼 거칠수록 더 빨리 달리겠지만, 실제로는 표면을 매끈하게 다듬을수록 잘 달린다. 뿐만 아니라 마찰열만으로는 미끄러운 층의 형성에 충분할 만큼 얼음을 녹이는 게 불가능하다는 정밀측정 결과도 있다.
현재는 얼음 표면엔 눈에 보이지 않을 정도로 얇은 물 층이 원래부터 항상 존재한다는 ‘표피층 이론’이 정설로 받아들여진다. 얼음 내부의 경우 물 분자가 상하좌우로 서로 연결돼 있는 데 반해, 표면은 한쪽이 공기와 접하고 있어 분자 간 연결이 약하기 때문에 얼음이 녹아 수막이 형성된다는 설명이다. 실제로 X-선 촬영기법 등을 동원해 확인한 결과, 영하 20℃에서도 얼음 표면에 물 분자가 남아 있고, 2017년 발표된 한 논문에 따르면 영하 70℃에서도 얼음 표면의 물 분자는 액체 상태라고 한다.
물이 이처럼 섭씨 0℃ 아래에서도 여전히 액체 상태에 있을 수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 이는 밀도와도 연관이 있다. 물은 영상 4℃에서 밀도가 가장 크고 온도가 낮아질수록 여타 액체와는 달리 밀도가 작아진다. 얼음이 물 위에 뜨는 것도 얼음의 밀도가 물보다 작기 때문이다. 밀도는 부피와 연관이 있고, 부피는 물 분자 구조에 의해 결정된다. 따라서 밀도 변화는 온도에 따라 물 분자 구조가 어떻게 바뀌는가와 연관돼 있다. 그런데 물의 구조 변화는 펨토초(1000조 분에 1초) 단위로 빠르게 이루어지기 때문에 실험실에서의 관찰이 어려웠고, 때문에 물의 특이한 밀도 변화는 오랫동안 원인이 제대로 규명되지 못한 채 해묵은 질문으로 남아 있었다. 그리고 2017년 스웨덴 스톡홀름 대학의 앤더스닐스 교수가 이끄는 연구팀이 이에 대해 의미 있는 답을 제공할 수 있는 실험에 성공했다. 실험 결과에 따르면 물 분자는 서로 다른 두 종류의 배열 상태를 갖는다. 즉 저밀도의 규칙적인 사면체(low density liquid, LDL)와 고밀도의 무질서한 혼합체(high density liquid, HDL) 구조다. 두 구조의 비율은 온도에 따라 달라지는데, 영상 4℃보다 낮은 온도로 내려가면 저밀도의 규칙적인 구조가 늘어난다. 달리 말하자면 온도가 높아질수록 분자들이 좀 더 조밀하게 압축된 무질서한 배열이 늘어난다. 그리고 유입된 열은 무질서 영역에 있는 분자들을 휘저어 서로 멀리 떨어지게 만드는데, 4℃보다 높은 온도에선 이 효과가 더 커져서 물의 밀도가 낮아진다. 영하 44℃가 되면 두 구조가 같은 비율로 존재하며 동시에 두 상태가 서로 바뀌는 요동현상(fluctuation)도 나타난다.
물의 특성을 살펴보다 뜬금없이 ‘몸에 좋은 육각수’란 유사 과학이 우리의 지갑을 털어갔던 게 생각난다. 물에 대한 우리의 무지를 이용한 씁쓸한 사례다. 흔하지만 예사롭지 않은 물에 대해 좀 더 눈과 귀를 열어야겠단 생각이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