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은도 홈페이지에 이 같은 조치들을 안내하고 있으니 나름의 노력을 홍보하고 있는 셈이다. 사실 그럴 만도 하다. 기준금리 1.25%에서 0.50%로 인하, 한미 통화스와프 체결, 회사채·기업어음(CP) 매입기구(SPV)에 대한 대출, 금융중개지원대출(금중대) 한도 증액 및 금리 인하 등등 열거하기도 벅찰 정도이기 때문이다.
반면, 한은은 올 한 해 그 어느 때보다 강한 비판을 받았다. 본연의 임무까지도 위협받는 상황이다. 올해 국감에서는 여야 가릴 것 없이 전대미문의 위기상황에서도 절간처럼 조용하다며 ‘한은사(寺)’라고 비판했다. 한은사라는 지적을 받은 건 올해가 처음이 아니다.
이 같은 비판의 근거는 크게 두 가지 이유 때문이다. 이는 한은 구성원 스스로도 말하는 “돌다리도 닳아 없어질 때까지 두드리고 건너지 않는다”는 한은 속성과 맥이 닿아 있다.
우선, 기준금리 인하 시기가 너무 늦었다는 것이다. 2월 27일 열린 금융통화위원회에서는 코로나19 확산에 따른 충격이 클 것으로 보면서도 금리를 동결했다. 그리고 불과 보름 만인 3월 16일 임시 금통위를 열어 50bp(1bp=0.01%P)나 인하했다.
신용도가 낮은 기업의 회사채와 CP를 매입키 위한 SPV에 대한 대출도 비난을 자초했다. 한은법 제80조에 영리기업에 대한 대출규정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한은은 당초 불가능하다며 버텼기 때문이다.
여기에 기자가 한 가지 이유를 덧붙이자면 일구이언(一口二言)으로 비칠 수 있는 한은의 커뮤니케이션이 있다. 앞선 2월 27일 금통위에서는 중소기업을 지원키 위해 시중은행에 저리로 지원하는 자금인 금중대 한도를 25조 원에서 30조 원으로 확대했다. 2013년 4월과 5월, 2014년 7월과 8월 각각 금중대를 증액하고 바로 다음 달 금리인하를 한 사례를 들어 이번에도 그렇지 않겠는가 하는 당시 기자 질문에 이주열 한은 총재는 “지금은 상황이 다르기 때문에 그때 그렇다고 해서 지금도 그럴 거라고 생각하는 것은 이치에 맞지 않다”고 잘라 말하기도 했다.
4월 2일부터 7월 28일까지 17차에 걸쳐 총 19조4300억 원 규모로 푼 무제한 환매조건부채권(RP) 매입 조치를 두고 한은 스스로 “한국판 양적완화”라고 규정했다. RP매입이란 일정기간 동안 한은에 담보채권을 맡기고 돈을 빌리는 것을 말한다. 한은 입장에서는 그만큼 시중에 돈을 푸는 효과가 있다. 반면, 주요국 양적완화를 집중 논의했던 11월 26일 금통위에서 한은 집행부는 “양적완화를 도입할 필요성은 크지 않다”고 판단했다. 사실상 RP매입은 양적완화 조치가 아니었음을 인정한 것이다.
최근 한은 책무(mandate·맨데이트)에 고용을 추가하자는 목소리가 높다. 실제, 국회 기획재정위원회 여야 의원들로부터 법안이 발의된 상태다.
한은 책무에 고용을 넣자는 목소리는 이명박 정부 때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미 연준(Fed)에서 금리를 인상할 조짐을 보이자 이를 처음 꺼내들었다. 고용은 경제지표의 대표적 후행변수라는 점에서 사실상 한은에 금리인상을 하지 말라는 압력이었다.
지급결제제도와 관련해 금융위원회 공세도 거세다. 핀테크(금융기술)와 빅테크(대형 정보통신기업) 육성 등을 명분으로 ‘전자금융거래법 개정안’을 내놨다. 이는 중앙은행인 한은의 마지막 존재 이유인 최종 대부자 역할을 위협하는 것이다.
기획재정부도 급증하는 국고채 발행 물량을 소화한다는 명목으로 내년부터 국고채 2년물을 발행키로 했다. 그간 통안채는 최장 2년물까지, 국고채는 3년물부터 50년물까지 발행해오면서 상호간 종목이 겹치지 않았었다. 기자는 10월 26일자 데스크칼럼 ‘국고채 2년물 발행이 단견일 수 있는 다섯 가지 이유’를 통해 국고채 2년물 발행의 문제점을 지적한 바 있다.
늦었지만 이주열 총재는 17일 물가안정설명회 자리에서 “정책 일관성 유지가 어렵다”며 사실상 한은 책무에 고용을 추가하는 것을 반대했다. 내년 통화정책방향을 결정하는 24일 금통위에서는 지급결제제도를 정비해 한은 역할을 강화하는 방향으로 한은법을 개정할 뜻을 시사했고, 통안채 3년물 발행을 공식화했다.
다만, 한은은 갈등으로 비치는 것에 대해 무척 조심하며 소극적인 분위기다. 한은이 듣는 말 중엔 ‘범생이’도 있다. 대부분 구성원이 공부는 잘하지만, 시키는 일만 잘할 뿐 소심하다라는 뜻이다.
누구는 법복을 입고 정치를 해 본분을 넘어 탈이다. 한은은 본분마저 제대로 하지 못해 탈이다. 내년엔 진일보한 모습을 기대해 본다. kimnh21c@