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거시 미디어를 OTT에 비해 열등재로 인식할 수밖에 없는 상황들이 있다.” (노창희 미디어미래연구소 실장)
코로나19로 온라인 동영상 서비스(OTT)가 급성장하고, 바이든이 미국 대선에 승리하며 미디어 정책 변화가 예측되는 시점. 레거시 미디어는 새로운 기회를 포착할 수 있을까, 속절없이 쇠락하고 말까. 전문가들은 레거시 미디어가 규제에 얽매여있어 시장에서 매력적인 대안으로 부상하지 못했고, OTT보다 열등재로 인지될 수밖에 없다고 지적했다. 레거시는 지상파 등 기존 방송을 뜻한다.
국내 방송의 미래를 가늠해보는 세미나가 22일 진행됐다. 변재일 더불어민주당 의원과 미디어미래연구소가 공동 주최한 ‘국내 미디어 생태계 지속 성장을 위한 과제’에서 관계자들은 정부 정책에 대한 진단을 비롯해 미디어의 미래를 대비하기 위한 대안들을 제시했다.
권오상 미디어미래연구소 센터장은 ‘2021 공정과 혁신의 상생을 위한 과제’를 통해 국내 미디어 생태계를 거시적으로 조망했다. 코로나19로 OTT가 레거시 미디어를 제치고 성장하는 현 상황에서 미국과 대한민국의 대선에 주목해야 한다는 것이다.
권 센터장은 미 바이든 정부가 구글, 애플, 페이스북, 아마존(GAFA)으로 대표되는 플랫폼 기업의 독과점 문제, 망 중립성 원칙, 5G에 대해 전향적 입장을 취할 것이라 주장했다. 구글 인앱 결제 확대 등 글로벌 사업자 영향력이 확대되며 위협이 증가하고 있어 이를 해체하려는 움직임이 강화될 것이라는 진단이다.
권 센터장은 “바이든 대통령 취임 이후 미국 연방통신위원회(FCC)를 비롯한 위원장들을 임명할 텐데, 아마 처음으로 (트럼프 정부에서) 폐지됐던 망 중립성을 원상 복귀할 것”이라며 “한편 우리 정부의 미디어 정부는 진보ㆍ보수 패러다임과 무관했다. 공익성 기조를 꾸준히 가지고 오면서 방송의 산업성을 조금씩 첨삭하는 과정을 거쳤다”라고 설명했다.
공익성에 기반을 둔 국내 레거시 미디어들에도 변화가 찾아왔다. 미디어의 화두에 ‘혁신’이 찾아온 것. 권 센터장이 2010년 11월부터 2020년 12월까지 구글트렌드를 분석한 결과에 따르면 2019년 1월을 기점으로 ‘넷플릭스’의 키워드 검색량이 ‘방송’을 크게 앞질렀다. 방송으로 대변되는 공정 화두가 넷플릭스로 대변되는 혁신에 대체되고 있다는 설명이다.
노창희 미디어미래연구소 실장은 ‘유료방송 혁신을 위한 규제 개선 방향’을 발표, 유료방송의 현실을 통해 국내 방송산업의 문제를 조망했다.
노 실장은 “최근 10년간 우리나라 유료방송 시장에서 유일하게 증가하던 매출이 주문형비디오(VOD)다. 신작 영화가 개봉되면 1만~1만1000원에 대한 단권 결제가 이뤄지곤 했다”며 “최근 영화진흥위 데이터를 보면 2020년 2월과 7월 VOD 결제 건수가 절반으로 줄었다”라고 지적했다.
준비된 영화들의 개봉이 미뤄지며 넷플릭스로 개봉 자리를 옮겼고, 국내 유료방송 사업자들에게 VOD로 돌아오기까지 지연되거나 VOD로 돌아오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와 같은 상황이 지속한다면 유료방송 시장이 어려움에 직면할 수 있을 것이라 우려를 표했다.
방송 제작비의 상승과 이로 인한 해외 제작자 의존 문제도 지적했다. 2015년 선보인 ‘응답하라 1988’의 제작비는 회당 약 3억 원이었다. 최근 방영 중인 ‘스위트홈’의 경우 제작비가 25억~30억 원 사이로, 2021년 릴리즈 될 ‘수리남’은 회당 제작비 40억 원으로 추산된다.
노 실장은 “A급 콘텐츠를 만들기 위해서는 어마어마한 제작비가 필요하다”라며 “이 제작비 부담이 커질수록 넷플릭스, 앞으로 들어올 디즈니플러스나 HBO에 대한 의존도가 커질 수밖에 없다”라고 말했다.
전문가들은 이어 국내 유료방송 시장의 요금이 지나치게 낮게 책정됐다고 우려를 표했다. 유료방송 가입자가 많이 늘어나지 않는 상황에서 가입자당 평균 매출(ARPU)이 8000원 선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분석이다.
노 실장은 “넷플릭스의 경우 1만 원에서 1만4000원 사이로 요금을 책정하고 있다”며 “해외 사업자의 경우 설비 투자를 하지 않아도 돼 원가 대비 우리나라 유료방송보다 이득을 더 많이 가져갈 수 있다”라고 말했다.
이후 토론에서는 대안 모색이 이뤄졌다. 정인숙 가천대학교 교수는 “정부 부처 이기주의로 진전이 없다”라며 “8월 OTT 관련 민관 합의체를 만든다고 했는데 문체부 콘텐츠 담당과 과기정통부, 방통위가 서로 주도권 싸움을 하고 있다. 사업자들은 서로 어느 부처에 줄을 서야 하는지 눈치를 보고 있는 상태”라고 지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