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정치권에서 1980년대를 공포에 떨게 했던 단어들이 언급되고 있다. 그만큼 뒤숭숭하다는 얘기다.
유독 이 단어들은 듣기만 해도 숨이 막힌다. ‘1987’ 등 군부 독재 시절 끔찍한 고문과 인권 탄압으로 악명 높았던 남영동 대공분실 당시 상황을 너무나도 적나라하게 잘 표현한 영화 탓이기도 하다.
어둠만이 존재하는 이곳, 젖은 바닥, 거친 숨소리와 괴로운 비명 등으로 표현된 말도 안 되는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은 마치 내가 겪은 듯한 충격과 같이 온몸에 소름이 돋는 듯한 공포에 떨게 한다.
고 김근태 전 의원이 군사정권에 맞서다가 20일 넘는 물고문과 전기고문에 피를 쏟았던 그곳. 고문 후유증으로 별세한 김 전 의원이 “지옥이었다. 물고문이 설치는 나치 수용소. 시간이 멈춰 버린 영원한 저주의 세계”라고 표현한 이곳을 우리가 어찌 잊을 수 있을까. 이런 무시무시한 대공분실이 15년 만에 다시 부활할 수도 있다는 얘기가 정치권에서 들린다. 더불어민주당이 최근 ‘법안소위’에서 국가정보원의 대공수사권을 경찰에 이관하는 내용의 국정원법 개정안을 단독 처리하면서다. 대공수사권을 향후 경찰수사를 총괄 지휘·감독할 국가수사본부로 넘기겠다는 의미다.
대공수사는 그동안 국정원, 국군 안보지원사령부, 경찰이 하며 각 기관 간 상호 감시와 견제, 균형을 맞춰왔다.
하지만 개정안이 통과돼 대공수사권이 경찰로 이관되면 견제와 균형이 무너질 뿐 아니라 민간 영역의 대공수사는 경찰이 독점하는 구조로 바뀔 것이란 우려의 목소리도 야권에서 울려 퍼진다. 즉 정권이 정보를 독점한 경찰을 이용해 영향력을 행사하며 정치독재를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 부분이 “남영동 대공분실을 부활시키는 5공 회귀법”이라는 비판이 제기되는 포인트다.
하태경 국민의힘 의원은 “민주당 국정원법은 국내정보와 수사를 분리하자고 하면서 오히려 경찰에서 국내정보와 대공수사권을 재결합시키고 있다”면서 5공 경찰이 될 수밖에 없는 이유를 지적했다.
이미 국정원은 국내정보를 하지 않기로 한 상황에서, 비대해진 경찰이 국내 정보까지 독점하게 되면 ‘경찰공화국’이 아니고 무엇이겠냐는 것. 여기에 대공수사권까지 가져오면 정말로 남영동 대공분실이 부활한 5공 시대로 회귀할 수 있다는 것이다.
야당이 두려워하는 것은 정권이 정보를 독점한 경찰을 이용해 정치권에 영향력을 행사할 가능성이다. 하지만 국민은 국가안보 전문가가 아닌 이상 그 어떤 판단을 할 수는 없다.국민들은 사실 '국정원법 개정안'에 대해서도 잘 알지 못한다.
다만 ‘군사정권 시절 회귀’라는 표현만 들어도 박종철 열사를 죽인 치안본부가 부활하는 건 아닌지 그저 두려울 뿐이다.
여야의 합의에 앞서 국민도 공감대를 형성할 수 있는 설명이 전제돼야 하는 게 아닌가 싶다. 하다못해 공청회나 토론회라도 진행됐어야 하는 건 아니었을까.
이 개정안이 통과됐을 경우 우리는 두려움에 떨 필요가 없는지, 대공수사권이 이관되면 어떤 상황이 벌어지는지 등에 대한 쉬운 표현의 설명이 필요할 뿐이다.
아울러 정치권에서 국가수사본부 독립성, 견고한 내부통제장치 마련 등을 함께 서둘러준다면 국민의힘이 우려하는 남영동 대공분실이 부활하는 일은 없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