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에게 제주는 ‘올레길’이 생기기 전과 생긴 이후로 나누어진다. 걷기의 맛에 빠져들기 전에는 제주에 올 일이 많지도 않았고, 오더라도 유명 관광지를 둘러보는 것이 주된 일이었다. 제주 올레를 걷기 시작하면서부터 나에게 제주는 자신을 뒤돌아보고 마음의 아픔을 씻고 가는 힐링의 장소로 변했다. 나의 첫 올레 걷기는 2011년 봄이었으니 ‘올레길’이 처음 만들어진 지 3년이 지났을 무렵이다. 지금으로부터 13년여 전 스페인의 ‘산티아고 가는 길’에서 착안하여 만들어진 ‘올레길’은 제주도 말로 ‘동네 작은길’이라는 뜻이라고 한다. 아름다움을 상대 비교할 수는 없겠으나, 제주의 산과 바다는 자연 그 자체만으로도 2000년 역사를 가진 스페인의 그 길 못지않다. 더욱이 제주에 얽힌 시간의 궤적을 따라서 삶의 순례를 하게 되는 아름다운 길이다. 처음 올레를 걸은 이후로 나는 삶의 중요한 고비에 접할 때마다 이곳을 찾았다. ‘올레길’을 숨이 차게 걸으면서 비워지는 마음을 통해 잊고 있던 자신의 본모습을 만났고, 덕분에 마음의 평화까지 얻을 수 있었다. ‘올레길’을 걷고 난 지친 몸으로 즐기는 제주의 산과 바다, 그리고 맑은 바람은 덤으로 따라오는 행복이다.
제주도 한복판에 우뚝 서 있는 한라산은 남쪽으로부터 다가오는 태풍을 막아 육지로 가는 피해를 피하게 하는 반도의 방어벽이기도 하다. 교통이 불편하던 시절에는 육지의 문명을 맛보기가 쉽지 않았을 한라산 남쪽에는 추사 김정희의 세한도의 배경이 되는 ‘대정’과 우리나라 근대 미술의 대가 이중섭의 흔적이 남아 있는 서귀포가 있다. 먹을 갈아 벼루 3개의 밑바닥을 뚫고, 붓 천 자루를 해지게 했던 추사가 위리안치(圍籬安置)되어 있었던 곳에서 느끼는 시간의 궤적은 특별하다. 그림을 그릴 종이마저 없었던 이중섭이 담뱃갑 은박지에 그린 ‘게’ 그림은 먹고사는 문제가 삶의 전부가 될 수 없음을 보여주는 시간의 궤적이다. 제주는 지금도 이렇게 모든 것을 품고 숨 쉬고 있다.
제주는 예로부터 바람이 많은 섬이다. 보통의 사람들에게 바람은 고난을 주는 자연이다. 특히, 바다에 나가 채취하는 수산물이 생활의 터전인 어부들에게 바람은 쉽게 극복하기 어려운 도전이다. 인류는 바다의 풍랑을 잠재우기 위하여 제사와 제물을 바쳐 왔다. 오늘날 기술은 바람을 이용해 전기를 만드는 에너지원으로 변화시키고 있다. 무엇보다도 자급자족할 만한 에너지가 없기에 항상 육지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던 이곳이 최근 들어서는 에너지 자립 섬이 되어 가고 있다. 아직은 그 양이 충분하지 못하기에 육지에서 보내주는 전기에 의존해야지만 언젠가는 제주의 바람과 태양이라는 자연 에너지가 이곳을 새로운 시간으로 안내해 갈 것이다. 지금도 이곳에는 렌터카와 택시 중 많은 차량이 내연기관이 없는 전기 자동차이다. 비록 경제적으로는 보조금을 받아야 하는 불완전한 교통수단이지만 화석연료에서 나오는 온실가스가 없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친환경적 가치가 되고 있다. 이제 제주도는 탄소 제로라는 목표를 설정하는 대한민국 최초의 도시가 되었다. 그리고 여기저기 보이는 풍력 발전기는 새로운 제주의 볼거리가 되었다. 전기차를 타고 제주 바람을 맞으며 제주 일주 도로를 돌아본다. 새로운 에너지 세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