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밀전병ㆍ콧등치기… 강원도 겨울 시장의 미(味)담 = 강원도 재래시장은 먹을거리의 재료가 지역의 삶이다. 정선아리랑시장이나 영월서부시장이 대표적이다. 정선아리랑시장에서 2ㆍ7일에 열리는 오일장은 변함없이 북적거리고, 상설시장은 여행의 목적으로 부족함이 없다. 정선아리랑시장 동문과 서문 어느 쪽으로 들어가든 ‘메밀이야기’, ‘곤드레이야기’, ‘콧등치기이야기’ 등 먹자골목이 반긴다.
메밀전 부치는 고소한 기름 냄새가 코끝을 간질인다. 골목을 나눴지만 콧등치기, 곤드레밥, 올챙이국수 등을 한집에서 판다. 전은 메밀부침과 전병, 수수부꾸미, 녹두전 등 모둠전 형태로 5000원 선이다. 시장 음식의 진가를 맛볼 수 있다.
정선아리랑시장의 먹을거리는 재료가 지역을 말한다. 토양이 척박한 강원도는 논농사가 쉽지 않았다. 그나마 메밀, 옥수수, 감자 등 구황작물이 꿋꿋하게 자랐다. 강원도 사람들은 메밀로 전병과 콧등치기를, 옥수수로 올챙이국수를 만들어 먹었다.
재미난 이름 역시 사연이 있다. 콧등치기는 장국에 말아 먹는 메밀국수다. 막국수와 달리 면이 굵고 투박하다. 후루룩 빨아들이면 면이 콧등을 칠 만하다. 올챙이국수는 옥수수 녹말을 묽게 반죽해서 구멍 뚫린 바가지에 내린다. 찰기가 적으니 툭툭 끊어져 올챙이묵처럼 생겼다. 콧등치기나 올챙이국수는 술술 넘어간다. 급하게 허기를 채우고 서둘러 일터로 돌아가던 아우라지 떼몰이꾼과 민둥산 화전민의 뒷모습이, 정선 사람들의 하루가 보이는 듯하다.
새로운 공간도 생겼다. 정선아리랑시장 골목 안쪽에 ‘청아랑몰’이 있다. 청춘과 아리랑을 합친 이름이다. 3층 컨테이너 건물은 1층 푸드 코트, 2층 액세서리 숍과 공방, 3층 퍼브(pub)로 구성된다. 김밥이나 떡볶이 같은 분식에서 마카롱, 과실주, 수제 맥주까지 작지만 알차다.
◇영월 ‘오픈 키친’에서 먹부림을 = 정선아리랑시장이 강원도 시장 음식 여행의 대표 주자라면, 영월서부시장은 떠오르는 강자다. 영월은 한동안 박물관 여행지로, 영화 ‘라디오 스타’ 촬영지로 불렸다. 근래에는 영월서부시장이 대세다. ‘라디오 스타’의 정서가 녹아든 소도시 시장이 ‘먹부림’으로 특화되며 찾는 이가 부쩍 늘었다.
영월서부시장은 영월서부아침시장과 서부공설시장, 영월종합상가가 합쳐 한 시장을 이룬다. 1959년에 정식 허가를 받았으니 60년이 넘었다. 영월 사람에게 여전히 동네 시장이지만, 여행자에게는 ‘메밀전병의 성지’다.
메밀전병 맛집은 영월서부아침시장 자리에 모여 있다. 농부들이 아침에 농산물을 팔고 돌아가서 아침시장이란 이름이 붙었다. 그 자리에 메밀전병 맛집이 다닥다닥하다. 입구부터 메밀전병 부치는 냄새에 군침이 돈다. 자그마하게 내건 간판에는 ○○집, ○○분식 같은 상호가 메밀전만큼이나 정겹다.
조금씩 다른 음식을 낸 시절도 있었지만, 이제는 모두 메밀전병과 메밀부침개 맛집이다. 철판에 기름을 쓱 두르고 묽은 반죽을 얇게 부친 다음, 볶은 김치와 당면 등으로 만든 소를 얹어 둘둘 만다. 심심한 맛인데 한 점씩 먹다 보면 금세 바닥이 드러난다. 가게마다 전 부칠 때 쓰는 기름, 볶은 김치의 매운맛, 전의 두께와 색깔이 다르다. 여행자는 방송에 나온 맛집을 찾고, 영월 사람은 미세한 맛의 차이를 알아채니 각자 단골집이 따로 있다. 하지만 ‘오픈 키친’에서 부친 메밀전을 입안 가득 넣고 먹을 때 행복감은 별반 다르지 않다. 주인은 할머니가 많은데, 무뚝뚝해 보여도 막상 앉으면 친절하다.
메밀전병과 더불어 영월서부시장 먹부림 양대 산맥의 하나는 닭강정이다. 메밀전병이 추억을 더해 은은한 맛을 빚는다면, 닭강정은 직설적이다. 매콤하고 달콤한 자극으로 매혹한다. 영월서부시장의 닭강정은 땅콩 가루를 넉넉히 묻혀 고소한 맛이 더하다. 시장 내 유명한 집들이 있는데, 바삭하게 씹히는 맛이 조금씩 다르다. 반대편 출구 영월종합상가 쪽에는 영화 ‘라디오 스타’의 주인공 안성기와 박중훈 벽화가 숨은 볼거리다.
◇한겨울 뜨끈한 추억 한 그릇, 예산 어죽 = 본래 어죽이란 음식이 그렇다. 농사일 바쁜 한여름에 하루 짬을 내, 마을 사람들이 개울에 모여 물놀이도 하고 천렵도 좀 하다가, 커다란 솥단지 걸고 잡은 물고기에 대파, 양파, 생강, 마늘, 고추장, 고춧가루, 불린 쌀이랑 국수, 수제비까지 끼니 될 만한 것 몽땅 넣고, 푹푹 끓여서 흐물흐물해진 생선 살에 밥과 국수, 수제비가 들어가 걸쭉해진 국물 한 사발 푸짐하게 나눠 먹는 것. 한겨울에는 얼음 깨고 물고기를 낚아 뜨끈한 국물 한 사발로 동장군을 물리치기도 했다.
그러니 조선 팔도 어디나 물고기가 사는 곳이라면 어죽이 있었다. 된장을 푸는지 고추장을 푸는지 맑은 국물을 내는지, 밥만 넣는지 수제비도 넣는지 국수까지 몽땅 넣는지에 따라 강원도식, 전라도식, 충청도식으로 나뉘었지만, 동네 사람 모여 맛있고 푸짐하게 영양 보충하는 건 모두 같았다.
충남 예산에서도 그랬다. 1964년 둘레 40㎞에 이르는 관개용 저수지를 준공하자, 동네 사람들이 농사짓는 틈틈이 모여서 솥단지를 걸고 고기를 잡았다. 붕어, 메기, 가물치, 동자개(빠가사리) 등 잡히는 대로 푹푹 끓이다가, 고춧가루 풀고 갖은 양념에 민물새우 넣어 시원한 국물을 만든다. 불린 쌀에 국수와 수제비까지 넣어 죽을 끓인 뒤, 다진 고추와 들깻가루, 참기름을 넣고 한소끔 더 끓여 먹었다. ‘충남식 어죽’이 탄생한 순간이다.
물론 민물고기로 만든 음식은 어죽뿐만 아니다. 제법 큰 붕어나 메기는 무와 시래기 잔뜩 넣어 찜으로, 동자개나 잡어는 칼칼한 매운탕으로, 살이 향긋한 민물새우와 미꾸라지는 튀김으로 먹었다. 동네 사람들끼리 혹은 집에서 별식으로 즐기던 어죽과 매운탕, 튀김은 경제성장과 함께 발전한 외식산업 붐을 타고 사 먹는 음식이 됐다.
지금 예당관광지로 개발된 예당호 일대에는 저마다 비법으로 만든 어죽과 붕어찜, 민물새우 튀김 등을 파는 식당 10여 곳이 있다. 여기도 ‘맛집’이 있어서 이름난 식당은 줄을 길게 서야 하니, 식사 시간은 피하는 것이 좋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