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타이어(현 한국테크놀로지그룹)가 한국테크놀로지의 상호를 ‘역도용’ 했다는 이유로 법적 분쟁에 휘말렸다. 업계에서는 ‘흔치 않은 대기업의 역도용 사례’라고 평가한다.
◇대기업이 중견기업 상호 ‘역도용’ 주장... 전례 찾기 힘들어
본지가 상호사용금지 소송과 관련해 최근 3년(2017~2019년)간 확정된 하급심(1ㆍ2심) 민사판결 37건을 분석한 결과 대기업이 중견기업의 상호를 도용해 피소당한 사례는 없었다. 복수의 법조인에게 조언을 요청해도 대기업과 중견기업 간의, 특히 상장기업 간의 상호 다툼은 사례를 찾기 어려웠다.
분석 사례의 상당수는 프랜차이즈 본부와 점주의 분쟁이었고, 개인 식당 간의 분쟁도 다수 확인됐다. 기업 간의 소송은 관계기업 사이에서 문제가 불거진 경우가 수 건 있었다. 이 중 작은 기업이 상대적으로 큰 기업을 상대로 소송을 제기한 사례는 없었다.
현재 한국테크놀로지는 한국타이어를 상대로 상호사용금지 가처분을 신청했다. 가처분 신청이란 본격적인 법정 다툼을 통해 확정판결을 받으려면 짧게는 1년에서 길면 수년이 걸려, 이 사이 돌이킬 수 없는 피해가 발생하는 것을 막기 위한 절차다.
이번 가처분을 법원이 받아들여질 경우, 한국타이어는 상호를 ‘한국테크놀로지그룹’으로 변경한 지 수개월 만에 다시 바꿔야 한다.
◇가처분 신청, 쟁점은 ‘긴급성’… ‘오너리스크’ 오명 피해 인정될까
법조계에 따르면 가처분 신청에서 주요한 쟁점은 ‘긴급성’이다. 한국테크놀로지 측은 한국타이어가 9월부터 수개월 간 ‘한국테크놀로지그룹’이란 상호를 사용하면서 피해가 크다고 주장한다.
두 회사 모두 상장사인데 다, 자동차부품 관련 업종이기 때문에 투자자들의 혼동이 크다는 설명이다. 실제 11일 장 마감 후 조현식 한국타이어 대표의 횡령·배임 혐의가 불거지자, 한국테크놀로지의 주가는 이후 7거래일 중 5거래일을 하락 마감했다.
한국테크놀로지의 하락세는 회사 20일 ‘호재성’으로 통하는 타법인 증권 취득 공시를 한 후에야 멈췄다. 한국테크놀로지의 소액주주는 9월 말 기준 1만898명이며, 전 거래일인 20일 종가 기준으로 이들이 보유한 지분가치는 870억 원 수준이다.
한국테크놀로지의 주가 하락이 한국타이어의 공시 때문이라고 단정 짓기는 어렵지만, 이 기간에 특별한 이슈가 없었다는 점과 몇몇 언론에서 두 기업을 혼동한 사례가 있었다는 점을 고려하면 무관치 않다는 업계의 해석이 나온다.
또 오너리스크가 ‘현재 진행형’이란 점도 불안 요인으로 꼽힌다. 한국타이어의 대표와 사장을 맡고 있는 조씨 형제는 검찰의 기소에 따라 내년 초 법정에 설 것으로 알려졌다.
이는 상호사용금지의 근거가 되는 상법 23조 1항의 ‘누구든지 부정한 목적으로 타인의 영업으로 오인할 수 있는 상호를 사용하지 못 한다’는 조항과도 관련이 있다. 이 조항 위반 여부를 판단하려면 ‘양 업무의 주체가 서로 관련이 있는 것으로 생각하거나, 그 타인의 상호가 현저하게 널리 알려져 일반인으로부터 기업의 명성으로 인해 견고한 신뢰를 획득한 경우’인지를 종합적 고려해야 한다.
과거 판례를 살펴보면 인지도 관련 판단에서 법원은 포털사이트 검색을 근거로 삼은 복수의 하급심 판례가 있다. 2013년 1심 재판에서 무역업을 하는 회사가 인터넷 영업자를 상대로 제기한 상호사용금지 소송에서 재판부는 야후, 네이트 등 포털 사이트에서 검색된 결과 등을 근거로 인지도가 있다고 판단해, 인터넷 영업자의 상호 사용을 금지하는 판결을 내렸다.
대구고등법원 2011년 선고된 한국교직원공제회 관련 상호사용금지 소송에서도 재판부는 신문과 잡지 등에 정기적으로 원고의 사업에 관한 홍보 광고를 지속적으로 게재했다는 등을 근거로 주지성을 인정했다.
수원지방법원에서 2003년 결론이 난 ‘백세주’와 ‘주식회사 백세주’와의 소송에서도 법원은 국순당의 백세주가 광고 등을 통해 국내에 널리 인식됐다는 점 등을 근거로 주지성을 인정했다. 한국테크놀로지는 상장 후 활발한 IR 활동을 통해 많은 사업내용이 언론을 통해 알려왔다.
◇소송 후 책임 소재도 ‘주목’
가처분 신청과 본안 소송에서 판결이 내려지면, ‘책임 소재’로 후폭풍이 예상된다. 과거 판례를 살펴보면 상호사용금지 관련 소송에는 △손해배상청구 △위약금 지급 △부당이득금 △부정 경쟁 방지 등을 함께 다툰 사례가 많다.
일례로 2017년 확정된 금속회사 간의 법정 다툼을 보면 한자가 섞인 상호를 쓰던 A사의 상호를 한글로 쓴 B사의 경우 사명을 바꾼 지 1년 후에 A사와 같은 사업을 시작했다. B사는 해당 상호를 2016년까지 사용했고, 이후 법정 다툼에서 패소해 손해를 보상해야 했다.
한국타이어는 상호 변경 후 CI, 홈페이지 등을 모두 ‘한국테크놀로지그룹’을 기준으로 변경한 상태다. 해당 이사회 의결을 살펴보면, 2명의 사내이사와 3명의 사외이사 등 총 5명 중에서 조 대표이사 부회장, 김준기ㆍ김한규 사외이사 등 3명이 출석해 주총 안건을 결정했다. 정관상 과반수 이사가 출석해야 하는데, 이를 간신히 맞춘 수준이다.
업계는 양측이 모두 물러서기 어려운 입장인 것으로 관측한다. 한국타이어 측은 조 대표가 직접 이사회 승인을 한 내용이고, 한국테크놀로지 측은 ‘약탈적’ 사명변경에 대해 비판의 목소리를 키우고 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