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년도 정부 예산안 합의를 전제로 다른 사항도 이행하겠다는 것이다. 국회 예산결산특별위원회의 예산안 협의가 진행되고 있는 상황에서 협상력을 높이기 위해 전략적으로 모호한 태도를 취한 것으로 분석된다.
심재철 자유한국당 원내대표는 9일 국회에서 열린 의원총회 이후 기자들과 만나 필리버스터 철회에 대해 “예산안이 합의 처리 될 것이라는 기대를 갖고 (여야 3당 교섭단체 원내대표와) 합의했다”며 “간사 간 논의하고 있고, 예산안이 합의되면 다른 모든 것이 잘 풀릴 것”이라고 설명했다.
앞서 이날 오전 심재철 신임 원내대표는 문희상 국회의장 주재로 이인영 더불어민주당, 오신환 바른미래당 원내대표와 회동을 갖고 국회 정상화에 합의했다. 한국당이 의원총회를 거쳐 199개 본회의 안건에 대해 신청한 필리버스터를 거두면 정부 예산안과 민생법안을 10일 본회의에서 처리하고, 문희상 국회의장이 패스트트랙(신속처리안건)에 지정된 공직선거법 개정안과 공수처(고위공직자범죄수사처) 법안을 이번 정기국회 안에 상정하지 않겠다는 내용이다.
국회 예산결산특별위원장이기도 한 김재원 정책위의장은 “합의문 내용 전체가 우리 당과 더불어민주당이 예산안을 합의 처리한다는 전제 조건이 있는 것”이라며 “지금 예산안이 (지난달) 30일 이후의 내용을 모르기 때문에 3당 간사가 (4+1 협의체에서) 어떻게 진행됐는지 확인을 하고, 예산안 수정안을 어떻게 만들지 논의한 결과를 봐야 그다음 단계에 대해 말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의원총회 이후 한국당의 입장은 여야 3당 합의 직후 발표된 내용과 미묘한 차이가 있다. 이는 한국당 내에서 필리버스터 철회에 거부감을 드러낸 의원이 적지 않았기 때문인 것으로 분석된다. 심 원내대표는 여야 3당 합의사항에 대한 의원들의 반발 여부에 대해 “반대 의견도 있고 찬성 의견도 있었다”고만 짧게 답했다. ‘필리버스터 철회 가능성이 열려 있다고 봐도 되느냐’는 질문에 심 원내대표는 “이게 가 합의니까, 초안이니까”라며 합의가 번복될 수 있다는 일말의 여지를 남겼다. 이와 관련해 일각에서는 심 원내대표가 취임 첫날부터 결정 사항을 의원총회에서 추인받지 못한 상황을 두고 ‘리더십’에 문제를 드러냈다는 평가도 제기된다.
여당 입장에서는 한국당이 여야 원내대표 간 합의를 지키지 않는 것으로 비칠 수도 있어 정국의 ‘불씨’를 남겨뒀다는 관측도 나온다. 더불어민주당은 당장 “심각한 유감”을 표하며 반발했다. 정춘숙 민주당 대변인은 “한국당 신임 원내대표가 3당 원내대표 간 첫 번째 합의 사항도 지키지 않은 상황이 참으로 어처구니가 없다”며 “한국당이 꼼수를 쓴 건데 이런 식으로 어떻게 신뢰를 쌓느냐. 이런 식의 무책임한 태도를 보여선 안 된다”고 비난했다.
이어 ‘예산 합의가 먼저’라는 한국당의 주장에 대해 정 대변인은 “말이 되지 않는다”며 “예산안 합의 처리와 필리버스터 철회는 패키지로 같이 가는 것”이라고 반박했다. 그러면서 ‘10일 본회의에 패스트트랙 법안까지 상정할 수도 있느냐’는 질문에 정 대변인은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고 답했다. 앞으로 한국당의 태도 변화에 따라 민주당 또한 패스트트랙 법안 상정을 임시국회로 미루기로 했던 합의 내용 역시 바꿀 수 있다는 뜻으로 풀이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