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이의 갈채를 받으며 세계 정상이에 섰던 장한나는 왜 그 자리에서 내려와 지휘봉을 쥐고 포디엄(지휘대)에 선 것일까? 그녀는 현미경이 아닌 망원경을 보고 싶었다고 한다. 첼로 연주곡들이 한정되어 있다 보니 같은 곡을 반복하며 연습해야 했단다. 그러나 지휘자가 된 이후로는 위대한 작곡가인 말러·브루크너·베토벤 등의 교향곡을 접하며 좀 더 풍성하고 폭넓은 음악의 세계로 항해가 가능해졌다고 한다. 멈추지 않는 성장과 진화의 욕구를 볼 수 있는 부분인 것 같다.
2007년 지휘자로 정식 데뷔한 장한나는 이후 ‘BBC 뮤직 매거진(Music Magazine)’이 선정한 최고의 여성 지휘자 19인에 선정됐고, 10년 만에 노르웨이 ‘트론헤임 오케스트라’ 상임 지휘자로 올라섰다. 한국·노르웨이 수교 60주년인 뜻깊은 올해 노르웨이의 대표적 오케스트라와 함께 방한한 그녀를 응원하기 위해 예술의전당을 찾았다.
장한나가 노르웨이의 트론헤임 오케스트라를 이끌고 있어서인지, 노르웨이의 대표적 작곡가 에드바르 그리그의 작품 두 곡과 차이콥스키의 교향곡 6번 ‘비창’으로 이번 무대를 구성했다. 포디엄에 선 마에스트라(여성 지휘자) 장한나는 약간은 경직된 듯 보였다. 세계적 첼리스트에서 젊은 신예 지휘자로 변신한 장한나의 새로운 모습을 기대 어린 마음으로 바라보는 나 또한 객석에서 그녀를 응원했다.
고국 무대에 서서 너무 긴장한 탓이었을까? 오케스트라를 이끄는 지휘자 장한나에게서 예전에 연주 시 보여주었던 음악적 카리스마를 느끼기에는 아쉬움이 있었다. 오케스트라와 무대를 장악하는 것이 조금은 버거워 보였다. 두 번째 곡은 차이콥스키·퀸 엘리자베스·쇼팽 등 세계 3대 콩쿠르를 석권한 피아니스트 임동혁과의 협연으로 이루어졌다. 또래이자 세계적 수준의 연주자라는 공통분모 때문인지 처음 곡보다 훨씬 깊이 있는 연주가 진행되었다. 그러나 임동혁의 리드 속에 끝난 협연이었다.
인터미션을 맞이하면서 ‘세계 최정상의 첼리스트가 하루아침에 세계 최정상의 지휘자가 될 수는 없지 않겠냐’라고 스스로 달랬다. 그리고 세계 최고의 자리에서 내려와 지휘봉을 다시 잡고 음 하나하나를 철저하게 짚으며 정상을 향해 나아가고 있는 그녀의 모습에 끝없는 박수를 보내기로 했다. 그것만으로도 그녀는 정말 멋진 사람이었다.
마지막 곡인 차이콥스키의 ‘비창’이 시작되었다. 긴장감이 풀리고 음악에 대한 몰입도가 높아져서일까? 갑자기 장한나가 이전 무대와 달리 오케스트라를 장악하고 더 나아가 무대와 관객을 압도하기 시작했다. 이 세상에 아무도 없는 양, 오로지 그녀의 시공간에서 음악과의 사투를 벌이는 것 같았다.
곡이 끝나자 장한나는 온몸이 얼어붙은 듯 한동안 멈춰 있었다. 완전히 몰입했던 것이다. 다시 현실 세계로 돌아오는 데 얼마간의 시간이 필요해 보였다. 땀에 흠뻑 적은 머리를 쓸어 올리며 관객 쪽으로 돌아섰을 때, 그녀는 마치 마라톤 완주자가 얼굴 가득 내뿜는 안도의 한숨과 환한 미소로 우리를 맞이했다. “브라보! 브라보!” 정말로 대단했다. 나를 포함한 수많은 사람들이 기립 박수로 그녀의 열정과 노력에 경의를 표했다.
도전은 늘 아름다운 것이다. 그리고 최선을 다한 열정적 노력은 늘 감동을 준다. 오르기도 힘든 세계 최정상에서 그 영광을 뒤로한 채 묵묵히 자기 길을 가고 있는 그녀. 노력이 재능을 뛰어넘고 매 순간의 최선이 예술을 넘어서는 감동을 선사하는 거인이 되어 고국에 돌아온 것이다. 10년 뒤, 20년 뒤 그녀는 어떤 모습으로 우리를 마주할까? 최고를 넘어선 최선의 순간이 선사하는 진한 감동을 준 그녀에게 머리 숙여 경의를 표한다. 특히나 재능을 노력과 투지로 넘어 주어서 고맙다. 인간의 위대함이 무엇인지 다시금 보여주어서 고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