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잇따른 유명인 자살을 대하는 사회 분위기는 가볍다. 배우 설리(본명 최진리)와 가수 구하라의 자살을 놓고 온라인 여론은 ‘악성댓글 작성자(악플러)’를 자살 원인으로 특정하고 있다. 덩달아 정치권에선 일명 ‘설리법’인 악플방지법을 도입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온다.
사인이 불분명한 시신에 대해 부검으로 사인을 밝히듯, 자살 사망자에 대해선 ‘심리부검’을 통해 자살의 원인을 추정한다. 고인의 사망 전 흔적을 수집하고 지인들을 면담해 자살에 이르기까지 행적과 심리상태를 파악하는 작업이다. 최근 숨진 두 연예인에 대해선 심리부검이 없었다. 자살의 원인도 불분명하다. 이런 상황에 제삼자가 섣불리 자살 원인을 특정하는 건 또 다른 문제를 부른다. 실제 자살을 시도한 계기가 된 ‘진범’을 감추고, 겉으로 보기에 자살 사망자와 비슷한 어려움을 겪고 있는 사람들의 연쇄적인 자살, ‘베르테르 효과’를 초래할 수 있다.
◇‘악플이 전부인’ 자살은 없다 = 여론이나 일부 언론의 보도처럼 악플이 자살의 원인 중 하나로 작용할 순 있지만, 악플이 원인의 전부인 자살은 없다고 전문가들은 입을 모은다.
중앙심리부검센터가 9월 발표한 ‘2018년 심리부검 면담결과 보고서’에 따르면, 자살 경로가 시작돼 실제 자살 사망에 이르기까지 평균적으로 약 10년(120.89개월)이 걸렸다. 이 기간 중 사망자들은 평균 5개, 많게는 12개의 위험 요인을 경험했다. 34세 이하는 자살경로 기간이 평균 60.94개월로 상대적으로 짧았다. 정신건강 문제(우울장애 등), 상사ㆍ동료관계, 연애문제, 업무부담, 학업 문제 등이 주된 위험 요인이었다. 65세 이상은 이 기간이 평균 226.20개월이었다.
103명의 심리부검 대상자 중 자살 위험 요인이 특정된 사례는 한 건도 없었다.
보고서에서 제시한 자살경로 패턴 예시를 보면, 대체로 자살경로가 시작된 사건으로 인해 정신건강 문제가 발생하고, 이후 대인ㆍ가족관계 문제, 경제ㆍ신체적 문제가 연쇄적으로 발생했다. 실업에서 자살경로가 시작된 자살 사망자의 경우 단기적으로 무직 상태가 이어지면서 우울장애 등 정신건강 문제를 겪었다. 이후 대인관계가 단절되고, 취업 준비에선 거듭된 실패를 겪었다.
악플도 마찬가지다. 정신건강 문제를 초래할 순 있지만, 그 자체가 자살로 이어지진 않는다. 보고서를 작성한 이효진 팀장은 “정신건강 문제를 가장 중요한 위험 요인 중 하나로 다루긴 하지만, 실제로는 자살을 시도하기 직전에 겪었던 사건이 방아쇠 역할을 한다”고 설명했다.
자살 직전의 심리상태를 신체에 비유하면 ‘마음의 면역이 떨어진 상태’다. 신체 면역이 떨어지면 세균이나 바이러스에 쉽게 노출되듯, 우울감이나 패배감, 무망감(無望感, 희망이 없다는 느낌), 대인관계 좌절에 빠져 마음의 면역이 떨어지면 작은 사건에도 쉽게 무너진다. 악플은 마음의 면역을 떨어뜨리는 요인 중 하나다. 이 팀장은 “다리가 튼튼하지 못하면 약한 바람에도 흔들리듯 스트레스도 심리상태의 취약 정도에 따라 받아들이는 정도가 다르다”고 말했다.
이와 관련해 1월 발표된 학위논문(초기 성인의 자살에 영향을 미치는 심리사회적 요인들에 관한 연구: 자살경로 분석, 양선미 저)에선 패배감과 속박감, 무망감, 좌절된 대인관계 욕구가 자살행동의 매개로 작용한다는 분석 결과가 제시됐다. 특히 무망감과 자살행동이 순차적으로 발생하는데, 무망감 수준은 패배감을 경험하거나 대인관계 욕구가 좌절될수록 높아졌다.
◇“악플러 탓, 진실 보기를 거부하는 것” = 그렇다면 왜 화살이 악플러들에게만 집중될까. 심리학자 황상민 박사(황상민 심리상담소 대표)는 “진짜 이유가 무엇인지 알고 싶지 않다는 것”이라고 말했다. 자살자의 고통을 이해하고 그들을 위로하기보단, 자신들의 분노를 쏟아낼 대상으로 악플러를 택했을 뿐이라는 것이다.
이런 식의 ‘악플러 몰이’는 본질을 흐린다. 악플은 자살경로상 평균 5개의 위험 요인 중 한두 개에 영향을 미치는 수십 개 변수 중 하나일 테지만, 악플을 뺀 나머지 변수들은 거론조차 안 된다. 황 박사는 “연예인은 악플을 비롯해 대중의 과도한 관심, 살인적인 일정, 통제된 일상과 대인관계 등 많은 스트레스에 노출돼 있다”며 “스트레스의 빈도가 불규칙하고, 원인 제공자가 불특정 다수인 만큼 소속 연예인의 심리ㆍ신체 변화도 살피고 관리할 책임은 기획사에 있는 것인데, 단순히 악플 탓으로 취급되면 이런 다른 문제들은 개선할 수가 없다”고 지적했다.
이 팀장도 “악플 근절이라는 게 사회 차원에선 논의될 수 있는 방법이겠지만, 악플 한 가지에만 매몰되는 건 바람직하지 않다”고 말했다.
더욱이 자살의 원인을 추정하는 데 있어 생활고, 악플로 인한 우울증, 외로움 같은 단순화는 또 다른 문제로 이어질 가능성이 크다. 자살 대상에게 친밀감을 느끼면서 그와 비슷한 어려움을 호소하고 있던 사람들의 연쇄적인 자살, 베르테르 효과가 대표적인 사례다. 파급효과가 가장 컸던 유명인 자살은 2008년 10월 배우 최진실의 자살로, 일평균 29.7명이 모방 자살했다.
보건복지부 관계자는 “현재 자살보도 권고기준을 통해 자살 방법ㆍ수단을 명시하거나 유서 내용을 언급하는 부분 등에 대해선 제재를 하고 있지만, 기준을 보다 세분화할 필요가 있는 건 사실”이라며 “큰 방향에선 자살의 원인을 특정하거나 단순화하는 등 자살을 가볍게 여기는 사회 분위기를 조성하는 행위에 대해서도 별도의 기준을 만들 필요가 있다고 본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