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럼에도 불구하고 세계의 많은 개발도상국들은 여전히 우리의 경제성장을 벤치마킹하고 있다. 절대 빈곤 상황에서 짧은 시간에 선진국의 반열에 오른 우리 경험을 배우기 위해서이다. 변변한 자연 자원이 없이도 자동차, 조선, 철강, 석유화학 등 전통 제조업뿐만 아니라 반도체, 휴대전화 등 첨단 IT분야에서도 세계적 경쟁력을 갖춘 기업들을 키웠기 때문이다. 국내에서 경제력 집중, 양극화, 고용 없는 성장 등 여러 문제를 제기하지만 이들에게는 여전히 매력적이다. 산업 역사상 한국의 제조업들이 그들의 미래를 이끌 수 있다고 보며 적극적으로 현지 투자를 유치한다. 이를 위해 신흥국 정상들이 우리나라를 찾고, 공무원들은 한국의 대학이나 공공기관에서 우리를 직접 배우고 있다.
신흥국이 경제 성장을 시작하려면 초기 인프라 투자 자본을 조달하기 위해 국내 저축률을 높여야 한다. 그리고 생산성이 낮은 부문에서 높은 부문으로 자본이나 인력과 같은 생산요소의 이동이 지속적으로 이뤄져야 한다. 우리나라도 개발 초기 단계에 높은 저축률을 실현하였으며, 산업구조가 농업에서 제조업으로 전환하며 생산요소의 이동이 이뤄졌다. 이를 달성하기 위해 수출 주도형 경제성장과 선택과 집중을 통한 불균형 성장 전략이 추진되었다. 높은 교육열과 강력한 리더십이 고도 성장을 뒷받침하였다.
필자는 대학에서 신흥국 학생들에게 이것은 성장의 필요조건이었다고 설명한다. 오히려 노벨경제학상 수상자인 아서 루이스 교수가 이야기한 ‘경제하려는 의지’에 주목해야 한다. ‘잘 살아 보자’라는 국민들의 노력과 ‘할 수 있다’라는 기업가 정신이 우리가 자원이 없는 상태에서 제조업 강국을 이룩한 원동력이 되었음을 강조한다.
많은 신흥국들이 우리처럼 경제개발 계획을 수립하고, 경제성장에 필요한 개발은행이나 싱크탱크를 설립해 이를 뒷받침하며 외국인 투자 유치에 적극 나섬에도 불구하고 목표한 성과를 달성하지 못한다. 신흥국 공무원들은 자기 나라의 종교적 갈등이나 인종적 다양성 등에 따른 사회적 통합의 결여, 지도자들의 부패가 문제라고 이야기한다. 결과적으로 자본과 두뇌의 해외 유출 현상이 일어나고 국민들의 ‘경제하려는 의지’나 ‘하면 된다’는 정신이 부족함을 지적한다.
정부 간 산업 협력을 위해 여러 신흥 개발도상국들을 방문한 적이 있다. 그중 한 나라가 기억에 남는다. 정부에 회의하러 가는데 그 부처보다 훨씬 현대화된 큰 건물이 눈에 띄었다. 어딘지 궁금해서 물어보니 선진국 원조 기구 사옥이라고 한다. 게다가 수도 중심지에 많은 국제기구 본부나 지역 사무소들이 위치하고 있다. 그런데 이 나라는 아이러니하게도 두뇌 유출이 경제성장을 가로막는 걸림돌이 되고 있다. 현지에 있는 국제기구의 역량이 국내 성장의 윤활유 역할을 하지 못하고, 우수한 인력들이 해외로 나가려는 열망을 쉽게 실현해주는 교량 역할만을 하고 있을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나라는 주변 국가에 비해 좋은 여건을 갖추었음에도 불구하고 세계 최빈국이다.
우리 사회가 경제 운용 방식에 논란을 겪고 있다. 보수나 진보 모두 일자리 창출과 복지 개선을 위해 지속적 경제성장이 필요하다는 데는 공감한다. 하지만 한편에서는 경제 성장을 위해 노동시장의 유연성, 시장 기능의 중시를 주장하는 데 반해, 다른 편에서는 소외계층에 대한 우선 배려와 재정의 적극적인 역할을 강조한다. 일반 국민들로서는 혼란스럽다.
우리 경제가 어느 정도 성숙 단계에 도달하고, 대외 의존도가 높은 상황에서 과거처럼 정책 시행의 효과가 금방 나타나 기대한 성과를 보이기는 쉽지 않다. 지금처럼 불확실성이 큰 상황에서는 외부 충격에도 버틸 위기 대응 역량을 키우는 것이 정부의 최우선 과제이다. 경제가 활기를 회복하도록 단기적 성과를 추구하기보다는 규제 개선, 인적자원 개발, 기술혁신 등 성장 잠재력을 키우는 정책들에 우선 순위를 두어야 한다. 그리고 기업들이 국내에 투자를 확대하도록 투자 환경 개선과 도전 정신을 북돋워 주어야 한다. 현재 논란이 되는 정책들의 시행 여부도 가계나 기업들의 ‘경제하려는 의지’를 올바른 방향으로 살리는지 평가해 보면 보다 쉽게 답이 나오지 않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