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의 정치외교 난맥상과 한일 경제마찰은 가뜩이나 풀죽은 제4차 산업혁명에 결정타를 가하고 있다. 그 모습은 내년도 정부의 예산방침에 상징적으로 드러나고 있다.
홍남기 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은 23일 “내년도 예산안은 올해보다 9% 이상 늘어난 513조 원대 수준에서 편성을 준비 중”이라고 밝혔다. 최근 글로벌 경제상황과 경기 하방 리스크 등 경제여건 등을 감안할 때 2020년 예산안은 확장적 재정이 불가피하다는 인식이다. 예산당국에 따르면 내년 예산은 경제 활력을 뒷받침하는 예산, 사회안전망 강화를 포함한 포용 관련 예산, 국민 편익 증진과 안전 관련 예산 등 3개 부문에 집중 투입될 전망이다. 이는 가뜩이나 비중이 높은 복지예산의 대폭적 증가를 예고하는 것이다.
정부는 이번에 문제가 된 일본 수출규제와 관련, 일본 의존도가 높은 품목과 국가적으로 중요한 품목의 안정적 공급을 위해 특별회계를 신설해 매년 2조 원 이상 예산을 지속적으로 반영하겠다는 계획이다. 이와 함께 원천 소재 분야 자립을 위해 내년도 연구개발(R&D) 예산도 배증(倍增)시키겠다고 한다. 이렇게 되면 정부의 R&D 예산은 올해 20조5000억 원에서 22조 원대로 크게 늘어날 전망이다. 어느 대목에서도 제4차 산업혁명과 관련된 항목을 찾아볼 수 없다.
우리 산업정책에서 제4차 산업혁명이 처음부터 도외시된 것은 아니다. 지난 정부가 2014년 하반기부터 2015년 7월까지 전국에 구축한 18개 창조경제혁신센터는 제4차 산업혁명의 요람으로 볼 수 있다. 문재인 정부는 2017년 7월 창조경제 진흥업무를 중소벤처기업부로 이관하고, 그해 10월 대통령 직속 4차산업혁명위원회를 출범했다. 2018년 3월 문재인 대통령은 첫 번째 회의를 열었다. 문 대통령은 “정부가 제4차 산업혁명 대응에 국가의 역량을 집중하기 위해 중소벤처기업부를 신설했고, 컨트롤타워 역할을 할 4차산업혁명위원회도 출범시켰다”고 설명했다.
4차산업혁명위원회는 제4차 산업혁명에 대한 종합적 국가 전략과 각 부처별 실행계획 및 주요 정책을 마련했다. 인공지능(AI), 사물인터넷(IOT), 빅데이터 등에 대한 투자 확대 방안과 제도개선안도 내놨다. 자율자동차, 스마트공장, 드론산업 등 선도산업 분야 육성책도 소개했다. 그러나 지금 이 위원회를 평가하는 시각은 매우 차갑다. 그 원인은 몇 가지가 있을 것이다.
먼저 청와대-국회-정부부처의 ‘정책결정 3각 체제’ 속에서 위원회가 갖는 태생적 한계를 들 수 있다. 둘째, 4차산업혁명위원회의 주무부서인 중소벤처기업부의 정부 내 입지, 정책 및 실행능력 부족 등도 꼽을 수 있다. 셋째, 부처 간에 얽히고설킨 규제를 풀 수 있는 강력한 장치가 없다는 점은 무엇보다 큰 문제점으로 꼽을 수 있다. 4차 산업혁명은 융합과 오픈 이노베이션이 핵심이며, 이를 가능하게 하는 것이 규제완화이기 때문이다.
임채성 건국대 경영대학 교수(전 한국인더스트리4.0협회 회장)는 “세계는 이미 미국의 ICC(산업 인터넷 컨소시엄)와 독일의 플랫폼 인더스트리 4.0이 중심이 되어서 중국과 일본의 참여 아래 제조산업 혁신을 이끌고 있다”며 “우리에게 남은 시간은 없다”고 경고했다.
문재인 정부는 온통 탈(脫)일본과 극(克)일본, 북한 문제에 함몰되어 우리의 미래를 위한 제4차 산업혁명 관련 정책을 잊어버린 것 같다. 정부는 4차산업혁명위원회가 ‘대통령 직속’이란 사실을 상기하면서 관련 정책을 재점검하고 지속적으로 추진해 나가야 한다. 그것이 바로 대한민국의 미래를 위한 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