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는 통일신라의 문화를 이어받아 찬란한 중세 귀족문화로 꽃피운 시대다. 그들은 생존을 두고 북방의 이민족들과 날카롭게 대립하면서도 개방하고 포용했다. 그 정신은 500년 사직을 지탱한 버팀목이면서 문화를 생육한 자양분의 원천이었다. 이번 전시는 고려의 문화적 성취를 확인하고 공유하는 자리다.
역사와 문화에 대한 이해는 기본적으로 문자 기록과 유물에 기반한다. 기록은 기록자의 입맛에 따라 윤색되거나 폄훼되기 마련이다. 역성혁명을 통해 고려를 뒤엎고 건국한 조선의 관점에서 기록된 고려사가 그렇다. 그러나 유물은 시대를 가감 없이 기억하고 증언한다. 전시장은 그 고려를 기억하고 증언하는 유물들의 소리 없는 아우성으로 넘쳐나고 있었다.
그 아우성의 무게 때문일까, 전시장이 사뭇 다른 분위기로 다가온다. 구체적인 인물, 대표적인 사건, 시간의 연대기적 흐름을 서술하는 방식에서 벗어나 고려사회를 특징하는 몇 공간을 설정하고 관련된 유물을 유기적으로 연결하고 있어서 그럴지도 모르겠다. 세계를 향해 열려 있던 ‘수도 개경’과 ‘고려의 사원’, 고려인이 차를 마시던 ‘다점(茶店)’을 고려미술을 감상하는 무대로 설정한 것이 흥미롭다. 유물의 탄생과 시대적 배경, 미학적 특질은 그렇게 하나의 이야기로 엮어지고 있었고 나는 그 무대 속으로 흡입되었다.
관람 동선을 따라 전개되는 고려의 미술은 세속적이면서 초월적이다. 질곡의 삶을 살면서도 고려인들은 아름다움을 사랑했고, 그 마음을 담아 현세의 복락과 내세의 극락왕생을 빌었다. 지극한 신심에다 그들만의 미감이 더해져 궁극의 아름다움이 탄생하는 과정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진다. 그 중심에 비색청자가 있고 고려불화가 있었다. 나전으로 만든 불경함은 세밀해서 아름다웠고, 무쇠로 빚은 부처님은 거칠어서 성스러웠다.
걸음이 나아가면 새롭고 멈추면 찬란했다. 아득하게 펼쳐지는 아름다움이 지극해서 두려웠고 두려워서 전율했다. 그 아름다움은 미의 법문(法門)이 되어 소나기처럼 쏟아졌고, 나는 그 소나기를 온몸으로 맞아냈다. 그리고 그들이 꿈꾸던 아름다움이 마침내 나의 아름다움이 되었다. 500년 고려의 아름다움은 그렇게 나를 정화하고 있었다.
이번 전시에서는 이역만리 타국에서 고향을 찾은 명품도 여럿 만나게 된다. 명품은 유랑과 유전(流轉)의 운명을 타고 난다지만, 대면하는 기쁨은 잠깐이고 각각의 사연을 기억하는 고통은 오래간다. 나는 청자피리 앞에서 오래 머물렀고 천수천안관음상에 합장 배례하며 재회를 염원했다.
아쉬움도 없지 않았다. 무릇 전시란 관람자가 몰입하고 감동받도록 해야 하는 것. 그러기 위해서는 최선(最選)의 전시품을 준비하고 관람자를 매혹하는 진열과 연출이 이루어져야 한다. 하지만 공간 연출은 거칠었고 작품의 배치가 뒤섞인 탓인지 관람 동선은 자꾸 엇갈렸다. 공간과 유물이 부합하지 않는 곳도 더러 보였다. 그리고 고려의 섬세한 아름다움은 디지털 영상기술을 통할 때 더 큰 감동으로 다가오지 않을까 하는 기대, 콩알만 한 금속활자 한 점을 멀뚱멀뚱 쳐다보며 고려금속활자의 위대함을 떠올려야 하는 민망함…, 전시장 곳곳에서 노정되는 디테일의 부재가 오래도록 눈에 남았다.
고려 건국 1000년이 되던 해는 일제강점기라 우리는 기념하지 못했다. 굳이 그 불편한 기억을 떠올리지 않더라도 이번 특별전은 100년의 지혜와 역량이 모아져야 했다. 다양한 시각과 창의적인 기획으로 5년을 준비해도 넉넉지 않을 터, 1년 수개월 만에 이벤트(?)를 만들어내는 그 용기가 놀라울 뿐이다.
사족으로 덧붙인다. 전시는 정치적이어서는 안 되지만 누군가의 삶을 고무하고 사회변화를 염원하는 메시지를 담을 수 있어야 한다. 그런 면에서 유물을 통한 희랑대사(希朗大師)와 태조 왕건의 만남을 기획한 것은 멋진 아이디어였다. 그러나 그 아이디어는 매끄럽지 못한 준비로 소란을 불렀고, 그 소란이 이번 전시의 미흡함을 다 덮어주었다. 이 무슨 조화(造化)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