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반도체 업계의 고민거리는 반도체 가격하락, 중국의 추격과 더불어 심각한 인력유출 문제였다. 개미구멍에 둑이 무너지듯이 고급 엔지니어의 경쟁사 이직은 반도체 회사에 치명적일 수 있다.
특히, 기술력이 사업 경쟁력으로 직결되는 반도체 산업의 특성상 연구인력 유출은 곧 기술 유출을 의미한다. SK하이닉스가 기술력이 높은 엔지니어의 정년을 없애기로 한 것 역시 이러한 우려가 반영된 결정이라는 해석이 나온다.
27일 SK하이닉스는 기술력이 높은 엔지니어의 경우 정년과 관계없이 일할 수 있는 새로운 제도를 도입하겠다고 밝혔다. 일정 수준 이상의 전문성을 갖춘 우수한 엔지니어들은 정년 이후에도 활발하게 연구개발·제조·분석 등의 업무에 매진할 수 있게 된다.
SK하이닉스는 이 제도 도입으로 오랫동안 회사 성장에 기여한 우수한 기술인력들이 정년을 넘어서도 회사에서 실력을 발휘할 수 있게 되어 개개인은 물론 회사의 기술 역량 또한 한층 높일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국내 반도체 업계는 퇴직자를 중심으로 이미 1000명 넘는 전문 인력이 중국에 넘어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중국은 ‘반도체 굴기’를 표방하며, 과거 같은 언어를 쓰는 대만 반도체 인력을 대거 영입했다. 그러나 기대만큼 성과가 나오지 않자 최근 메모리 경험이 풍부한 국내 반도체 인력을 스카우트 대상으로 삼고, 연봉의 8배를 제시하며 적극적인 러브콜을 보내고 있다.
50대를 넘긴 반도체 업계 엔지니어들은 이런 유혹에 흔들릴 수밖에 없다. 50대를 넘겼지만, 임원으로 승진하지 못하고 정년을 앞둔 고급 인력들은 경력단절과 가족부양 등을 걱정해야 하기 때문이다.
반도체 업계 관계자는 “반도체 엔지니어들은 오랜 시간 공부를 해오며 그만큼 사회진출이 늦어진 사람들도 많다”며 “임원으로 갈 수 있는 사람은 한정적이고, 정년은 다가오는 상황에서 몇 배의 연봉과 함께 사회생활 수명이 늘어날 수 있다면, (중국향도) 충분히 고민해 볼 수 있다는 이들이 많다”고 말했다.
문제는 인력 유출이 곧 기술 유출로 직결될 수 있다는 점이다. 반도체는 생산 경험과 노하우가 핵심 기술로 꼽힌다. 글로벌 톱3 반도체 기업에 몸담으면서 기술 개발 및 생산 과정을 잘 알고 있는 정년을 앞둔 엔지니어들은 중국의 영입 타깃 1호가 된다.
최근에는 국내 반도체 회사에서 D램 설계를 담당한 고위 임원이 중국으로 이직, 국내 회사가 이 임원의 경쟁사 근무를 막아 달라며 법원에 전직금지가처분 신청을 낸 사례도 있다.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 산업통상자원부, 국정원 등은 ‘중국 반도체 인력 유출’ 해소에 머리를 맞대고 있지만 은밀하게 이뤄지는 이직, 직업의 자유 침해 우려 등에 막혀 뚜렷한 해법을 찾지 못하고 있다.
업계는 SK하이닉스의 ‘엔지니어 정년 이후 근무 가능한 제도 도입’이 인력 유출을 해소하는 작은 실마리가 되길 기대하고 있다. SK하이닉스에 앞서 LG디스플레이도 2011년 우수한 연구개발(R&D)인력 및 공정 장비 엔지니어들에게 실질적인 정년 연장을 가능하게 하는 ‘정년 후 연장근무제도’를 도입한 바 있다.
유만석 SK하이닉스 HR담당 전무는 “반도체 개발·제조 분야의 숙련된 인력에 대한 수요는 지속적으로 늘고 있다”며 “새롭게 도입하는 본 제도는 내년 정년 대상자부터 시행할 예정”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