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재인 정부의 길은 다른 것 같다. ‘기회의 평등과 과정의 공정’을 넘어 결과의 평등에 무게를 싣는다. 평등이 기본 가치인 진보정부의 숙명일지 모르겠다. 성장보다는 분배에 치중한다. 분배를 통해 결과의 불평등 문제를 풀어보겠다는 것이다. 대기업을 겨냥한 경제민주화와 법인세 인상, 보편적 복지, 부유층을 겨냥한 보유세 강화 추진 등은 이를 구현할 정책이다.
최저임금의 급격한 인상과 근로시간 단축으로 대표되는 소득주도성장은 결과의 불평등을 해소하기 위한 문재인 정부의 야심작이었다. 한계소비성향이 높은 저소득층의 소득 증대를 통해 소비와 투자를 늘려 경제 활력을 불어넣겠다는 것이다. 이른바 분수효과(Fountain Effect)다. 이상과 현실은 달랐다. 최저임금 인상으로 저소득층(하위 20%)의 가처분소득이 늘기는커녕 되레 7.6% 줄었다. 저소득층의 일자리가 사라진 탓이다. 소득 상위 20%와 하위 20%의 소득격차도 5.23배로 더 벌어졌다. 불평등을 해소하겠다며 추진한 정책이 불평등을 심화한 것이다.
고용 사정도 심각하다. 일자리 수는 급조한 수만 개의 공공 일자리에도 지난해의 절반에도 미치지 못한다. 제조업 일자리는 9만8000개나 줄었다. 11월 실업률만 놓고 보면 3.2%로 9년 만에 최고다. 일자리 정부의 일자리 성적표론 낙제점이다. 전통적인 지지층까지 돌아서며 지지율이 45%(갤럽)까지 밀린 이유다.
다급해진 정부가 ‘J노믹스’의 속도 조절을 공식화했다. 1년 반 만에 정책의 실패를 인정한 것이다. 정부는 최저임금의 급격한 인상을 막기 위해 경제 여건을 고려해 인상폭을 정하는 쪽으로 방향을 잡았다. 주 52시간 처벌 유예기간도 내년 2월까지 연장하기로 했고, 탄력근로제 단위기간을 현행 3개월에서 6개월로 확대하기로 한 상태다. 경제 상황 악화와 지지층 이탈을 막기 위한 고육책이다.
말 그대로 속도 조절이다. 정책의 전환이 아닌 ‘우측 깜빡이’를 켠 것이다. 이 정도로 좋아질 경제 상황이 아니다. 문 대통령이 대기업에 손을 내밀 때 이미 예고된 수순이었다. 문 대통령은 지난해 12월 현대차 충칭(重慶)공장 방문을 시작으로 잇따라 대기업 행사에 참석했다. 7월엔 삼성 인도공장 준공식에 갔고, 10월엔 SK하이닉스 청주공장 준공식을 찾았다. SK 방문 땐 아예 현장에서 일자리위원회까지 열었다. 문 대통령은 “좋은 일자리를 만드는 것은 결국 기업”이라며 “정부는 기업을 맞춤형으로 지원하는 서포터 타워 역할을 해야 한다”고 말했다. ‘친기업 행보’라고 해도 이의를 제기할 사람이 없을 정도다.
여당과 정부 일각의 움직임은 거꾸로였다. 경제계가 한목소리로 재고를 요청한 상법개정안과 공정거래법개정안의 조기 처리를 밀어붙이고 있다. 심지어 대기업과 협력사가 판매수익 등을 사전에 약속한 대로 배분하는 협력이익공유제까지 법제화하겠다고 나섰다. 반기업 정서가 여전하다.
문 대통령의 유화 제스처와 대기업을 옥죄는 여당의 행보는 이중적이고 모순적이다. 기업과 손잡고 양질의 일자리를 만들고 싶은 생각과 진보 색깔로 지지층을 결집해야 한다는 당위가 혼재돼 있다. 여권의 고민을 그대로 보여준다. 경제에 활력을 불어넣고 기업들이 뛰게 하려면 정책의 수정이 절실하지만 말처럼 쉽지 않다. 기존 정책을 고집하면 경제가 더 어려워질 수 있다. 양질의 일자리도 만들기 어렵다. 정책을 전환하면 단기간에 경제가 호전되진 않더라도 최소한 정책리스크는 피할 수 있다. 이를 모를 리 없지만 ‘우회전’하기엔 부담이 크다. 지지층이 등을 돌릴 수 있어서다. 실용노선을 걷다 지지층의 ‘변심’으로 곤욕을 치른 노무현 전 대통령을 옆에서 지켜본 터다. 당장 전통적 지지 기반인 노동계가 정부의 속도 조절을 정면 공격하고 나섰다. 경제는 악화일로다. 글로벌 경제위기를 예고하는 경고음도 커지고 있다. 지지율은 추락하고 있다. 정부가 사활을 건 김정은 국무위원장의 답방으로 단기 지지율 상승을 꾀할 순 있어도 경제문제를 덮을 순 없다. 결국 결단의 문제다. 시간은 문재인 정부 편이 아니다. leejc@