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중대표소송제도가 도입되면 상장 지주회사가 해외 투기자본의 놀이터가 될 것이라는 주장이 제기됐다. 이 제도 도입 시 단 돈 350만 원이면 우리나라 전체 상장 지주회사 주식을 1주씩 매입해 약 1200개에 달하는 계열사의 경영에 간섭할 수 있어 경영 활동이 위축될 수 있다는 우려가 높아지고 있다.
다중대표소송은 모회사 주주가 불법 행위를 한 자회사 혹은 손자회사 임원을 상대로 손해배상소송을 제기할 수 있는 제도다.
한국경제연구원은 10일 173개 지주회사 중 90개 상장 지주회사를 대상으로 다중대표소송의 영향을 분석한 결과 해외 투기자본이 쉬운 소송 지렛대로 지주회사를 좌지우지할 수 있다고 밝혔다. 한경연은 “상장 지주회사는 외국인의 놀이터가 될 것”이라고 성토하며 제도 도입을 강력히 반대했다.
한경연은 단독주주권이 채택되면 빗발치는 소송으로 정상적인 경영이 어려워질 것이라고 우려했다. 다중대표소송 도입 관련 상법개정안 중 고 노회찬 의원과 이훈 의원의 법안은 주주가 단 1주라도 가지고 있으면 소송 등을 행사할 수 있는 단독주주권을 소송 요건으로 정하고 있다. 특히 노 의원안에서 소송 가능한 계열사는 ‘사실상 지배회사’이기 때문에 지난달 13일 기준 상장 지주회사 시가총액인 184조 원의 0.000002%이자 전체 상장 지주회사의 1주 가격을 합친 350만 원만으로 90개 상장 지주회사 소속 1188개 전체 계열회사 임원에게 소송을 제기할 수 있다.
한경연 관계자는 "주당 6만8100원인 ㈜LG 주식 한 주 만 있으면 LG그룹의 65개 전체 계열사 임원에게 손해배상 소송을 제기할 수 있다"며 "채이배 의원 안의 경우 1억2000만 원만 있으면 ㈜LG 자회사 중 13개에 소 제기가 가능하다"고 말했다.
김종인 의원, 오신환 의원, 이종걸 의원이 발의하고 법무부가 지지하고 있는 ‘상장 모회사 지분 0.01% 이상 보유’, 및 ‘지주회사의 자회사 지분 50% 이상 보유’안을 적용하면 184억4000만 원으로 90개 상장 지주회사의 자회사 중 72.1%(408개)의 기업에 다중대표소송을 할 수 있다.
5억 8000만원만 있으면 롯데지주 자회사 중 13개에 다중대표소송 제기가 가능하다. 또 20억원 만 있으면 올 반기 기준 자산규모 453조원 규모의 신한금융지주 자회사 14개에 소제기가 가능하여 적은 금액으로 자산 수백조원 규모의 금융 그룹을 흔들 수도 있게 된다.
특히 다중대표소송제도는 단 돈 몇 만 원에 우리 기업의 핵심기밀이 유출될 수 있단 부작용도 안고 있다. 노 의원안과 채 의원안은 장부열람권 조항도 포함하고 있다. 노 의원안의 경우 모회사 주식을 1주만 갖고 있어도 모회사가 30% 이상 지분을 갖고 있는 자회사의 회계장부 열람이 가능하다. 지주회사의 몇 만원 짜리 주식 1주만 갖고 있어도 그 자회사의 장부를 모두 열람할 수 있는 것이다. 장부는 기업의 원가정보, 거래관계, 장기사업계획, 연구개발(R&D) 세부현황을 모두 담고 있어 장부를 열람한다는 것은 기업의 기밀을 보는 것으로 여겨지고 있다.
해외의 경쟁기업이 이 제도를 악용할 경우 지주회사의 주식을 한 주 구입한 후 자회사의 기밀을 모두 엿볼 수 있게 된다. 가령 해외의 석유화학 또는 배터리 업체가 27만1500원으로 (주)SK 주식 한 주를 산 후 SK이노베이션의 회계장부를 열람해 SK이노베이션의 기밀을 빼낼 수 있다.또한 채 의원안의 경우에도 1억9000만 원만 있으면 SK이노베이션의 장부 열람이 가능하다.
한경연 관계자는 “해외의 경쟁회사는 우리 기업의 기밀을 빼낼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적은 지분으로 소송을 다수 제기하여 경영활동을 방해할 수도 있다”고 설명했다.
한경연은 해외에 거의 없는 실험적 제도 도입에 신중해야 한다는 입장이다. 대표소송제도가 있는 상황에서 굳이 상법상 기본원칙인 법인격 독립의 원칙을 부인해가며 다중대표소송을 도입하는 것을 재고해야 한다는 것이다. 특히 다중대표소송을 명문으로 입법화한 나라는 전 세계에 일본밖에 없고 미국, 영국 등은 판례로 인정하지만 완전 모자회사 관계를 요구한다는 점에서 기업을 대상으로 한 실험적인 입법의 자제를 촉구하고 있다.
유환익 한경연 혁신성장실장은 “어려운 경영상황 속에서 다중대표소송이 도입되면 기업에게 또 하나의 족쇄가 될 것”이라고 평가하며 “기업에게 부담을 주는 제도를 도입할 때는 제도 도입이 미칠 영향이나 다른 나라에 보편적으로 도입되었는지 여부 등을 종합적으로 고려해야 할 것”이라고 지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