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연금 폐지가 불가능한 가장 큰 이유는 630조 원을 넘는 기금 규모다.
21일 보건복지부에 따르면 올해 5월 기준으로 국민연금기금 634조 원 중 632조9000억 원(99.8%)이 금융자산으로 묶여 있다. 여기에서 절반은 채권에, 나머지 절반은 주식과 부동산 등에 각각 투자돼 있다. 국민연금이 폐지되면 공단은 가입 기간 10년 미만인 가입자들에게 납부 보험료에 수익률을 더해 환급해야 하는데, 이 경우 연금기금 대부분을 현금화해야 한다. 기금 중 현금성 자산에 해당하는 단기자금 비중이 0.2%(2조2000억 원)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주식을 현금화하는 경우에는 국내 주요 기업들의 주가 폭락이 불가피하다. 현재 국민연금은 포스코, 네이버, KT 등의 최대주주다. 또 코스피 시가총액 1위인 삼성전자의 단일 최대주주이며 현대차, 현대중공업 지주 등에도 대주주로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이들 기업의 주가가 폭락하면 대한민국 금융시장이 통째로 휘청일 가능성이 크다. 전성인 홍익대 경제학과 교수는 국민연금을 ‘공룡’에 비유하며 “국민연금은 비대한 덩치 때문에 사는 주식은 무조건 오르고, 국민연금이 파는 주식은 무조건 떨어지는 착시를 일으킨다”고 말했다.
금융시장 혼란을 감수하고 기금을 전부 현금화한다고 해도 문제는 남는다. 국민연금이 폐지돼도 기존 노령연금 수급자들은 헌법의 소급입법 금지 원칙에 따라 연금 수급권을 재산권으로 보장받는다. 그런데 현재 적립된 기금으로는 환급액과 향후 연금 지급액을 모두 충당하는 게 불가능하다. 결국 기존 노령연금 수급자들의 연금급여를 세금으로 충당해야 한다.
반면, 폐지 시 부작용이 우려된다고 해서 현 제도를 그대로 유지할 수도 없는 상황이다. 국민연금 제도는 1988년 도입 당시 ‘보험료율 3%, 소득대체율 70%’로 설계됐다. 초기 적립금보다 초기 가입자들에 대한 연금급여 지출이 터무니없이 많은 구조다. 이대로라면 2057년 연금기금이 완전히 소진된다. 이후 가입자들이 명목소득대체율 40%를 보장받으려면 소득의 30%(사업장가입자는 15%) 수준을 보험료로 내야 한다. 특히 이 경우에도 급격한 기금 현금화로 금융시장 혼란이 발생할 가능성이 크다.
결국 국민연금의 지속 가능성을 높이면서 시장에 가해지는 충격을 줄이려면 보험료율을 적정 수준으로 인상해 급여 지급 여력을 확보하고, 기금의 현금화 일정을 최대한 늦추는 수밖에 없다. 김연명 중앙대 사회복지학과 교수는 “소득대체율을 50%까지 올리려면 보험료를 지금보다 3~4%포인트(P) 인상해야 한다”며 “퇴직연금 일부를 국민연금으로 돌려 보험료율 인상 부담을 낮추는 것도 방법이 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