규제 개혁을 외치며 출범했던 현 정부도 지난 정부와 별반 다를 게 없을 것이라는 게 최근 사석에서 만난 스타트업 대표들의 하소연이다. 정책은 쏟아지는데 중소기업과 스타트업은 여전히 낡은 규제와 구태의연한 관습에 발목이 잡혀 있다.
정부는 앞으로 대기업이 중소기업의 기술을 탈취할 경우 강력한 철퇴를 내리기로 했다. 중소기업과 거래할 때 반드시 비밀유지 협약서를 체결해야 하며 이를 어기면 범죄행위로 간주해 처벌하기로 했다. 관행처럼 이어져 온 중소기업에 대한 대기업의 갑질 영업 사례를 개선하겠다는 의지다.
더불어민주당과 정부는 국회에서 당정 협의를 통해 중소기업 기술 탈취 근절대책을 발표했다. 하반기에 상생협력법을 개정해 비밀유지 협약 체결을 의무화하기로 했다.
하도급 거래에서 예외적으로 기술 자료를 요구할 수 있는 사유는 최소화하고 반환과 폐기 일자를 명시화하도록 의무화할 계획이다. 특히 기술 탈취 가해 기업에 대한 입증 책임을 부여하는 제도는 특허법, 부정경쟁방지법, 상생협력법, 산업기술보호법 등에 도입한다. 기술 탈취 관련 하도급법, 특허법 등 5개 법규의 손해배상액을 손해액의 최대 10배까지 올리는 등 징벌적 손해배상제도도 도입한다.
그러나 일선 현장에선 이 대책이 실제 환경에서 적용될 수 있을지 반신반의하는 분위기가 역력하다. 중소·벤처기업 관계자들은 이 제도가 공허한 메아리에 그치지는 않을지 벌써부터 우려하고 있다.
이미 전 정권에서 반복해 비슷한 정책이 나왔지만 사실상 무용지물이었다. 새 정부가 들어서면서 중소기업을 위해 내놓은 정책도 힘을 발휘하지 못했다. 신뢰가 쌓일 시간이 없었다. 정부의 정책이 못 미더울 수밖에 없는 이유다.
실제로 전 정권에도 중소 벤처기업에 대한 대기업의 ‘갑질’을 원천봉쇄하기 위한 노력이 있었다. 2016년 4월 공정거래위원회는 중소·벤처기업에 대한 대기업의 기술 유용 실태를 직권조사했다. 중소 하청업체의 기술을 빼앗아 이용하는 원청업체의 ‘갑질’을 적발해내기 위한 조치였다. 하지만 실제로 대기업과 중소기업 간 갑질 관행은 바뀌지 않았다.
수년간 하도급 관계에서 일어나는 기술 유용은 끊임없이 문제가 돼 왔지만 정작 제재를 받은 사례는 드물었다. 대기업의 중소기업 기술 자료 요구·유용을 금지한 하도급법상 규정은 2010년 만들어졌지만 이후 6년간 제재 사례는 단 한 건에 그쳤다.
문재인 정부가 규제 개혁을 위해 내세웠던 ‘규제 샌드박스’가 제 역할을 하지 못하고 있는 점도 중소·벤처업계에 불신을 야기했다.
규제 샌드박스는 새로운 산업 육성을 위해 일정 기간 규제를 전면 면제해주는 제도다. 지난해 7월 ‘100대 국정과제’에 포함되며 처음 공식화됐고, 10월 대통령 직속 4차산업혁명위원회, 올 1월 규제 혁신 토론회 등에서 첫머리에 등장하며 핵심 정책으로 자리 잡았다.
하지만 규제 샌드박스는 반년이 넘도록 제자리걸음 중이다. 이 제도를 실행하기 위해서는 정보통신융합특별법·금융혁신지원특별법·산업융합촉진법·지역특구법 등 ‘4대 법안’이 통과돼야 하는데, 정보통신융합특별법을 제외하고는 아직 국회에 발의조차 안 됐다.
한 스타트업 대표는 “규제 샌드박스라는 제도가 만들어졌지만 실제 현장에선 전혀 도움이 되지 않고 있다”며 “네거티브 규제 도입을 위해서라도 하루빨리 규제 샌드박스가 현장에 적용돼야 한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