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패스트트랙 프로그램(이하 FTP)을 통해 단돈 1원도 받은 적이 없다.”
이성민 엠텍비젼 대표는 27일 이투데이와의 통화에서 이같이 말했다. 엠텍비전은 한 때 시가총액이 5000억 원에 달했던 코스닥 상장사였지만 키코 피해로 사세가 기울어 상장폐지됐다. 현재는 기업회생절차(법정관리)를 졸업한 상태지만 아직 예전 규모를 회복하지 못했다.
엠텍비젼의 FTP 사례는 키코 피해 중소기업에 자금을 지원하겠다며 도입한 이 제도가 얼마나 문제가 많았는지 여실히 드러난다. 자금난에 빠진 기업을 지원하기 위해 공급한 정책자금이 운영자금이 아닌 채무변제에 우선 쓰이게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양날의 검’ 된 대출 지원…은행은 이자놀이 = 키코 피해기업을 대상으로 한 FTP의 골자는 키코 손실금액을 떼어내 빠르게 조정하는 데 있다. 태산LCD의 흑자도산으로 은행까지 손실을 본 경험을 반면교사 삼아 은행과 기업이 키코 손실 부담을 나눠 지는 방안을 마련한 것이다. 정부의 FTP 운영지침에도 ‘키코 등 통화옵션거래 관련 손실처리’장을 따로 만들어 특별히 처리방안을 제시했다. 그러나 실제 은행은 거의 리스크를 지지 않고 기업이 키코 손실의 모든 책임을 떠안는 구조로 운영됐다.
운영지침 중 ‘제9조 통화옵션거래 손실발생 처리기준’을 보면 기업이 통화옵션거래를 청산할 때 발생하는 손실액을 계약은행이 거래기업 앞으로 대출 전환할 수 있도록 했다. 이때 만기나 이자율 등은 전적으로 채권은행 판단에 맡겼다.
이에 은행들은 매월 정산되는 키코 손실금 중 70%를 기업에서 현금변제로 회수하고 30%만 대출로 전환해 주는 방침을 정했다. 이후 개별 회사들의 신용도와 영업상황 등을 고려해 대출전환(자금지원 명목) 규모를 50% 전후로 조정했다. 그러나 기업이 필요한 순간 유동성을 공급하겠다는 FTP 제도의 취지와는 달리 기업의 목소리는 반영되지 않았다.
이 대표는 “큰 계약을 앞둔 상황에서 자금이 절실해 기존 50%이던 키코 손실 현금변제율을 30%로 낮추고 70%를 대출해 달라고 은행에 요청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며 “결국 영업에 지장이 왔고 이는 다시 자금난이 심화되는 악순환으로 이어졌다”고 말했다.
당시 FTP에 가입한 키코 피해 기업들은 키코 손실 중 대출전환한 금액의 상환유예를 지속적으로 요청했지만 이마저도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은행은 FTP 제도를 통해 신용보증기금, 기술보증기금 등 정부기관의 보증을 기반으로 중소기업에 안정적으로 대출을 해 주면서 이자를 챙긴 셈이다.
특히 키코 손실금이 대출전환 돼 키코 피해기업의 채무 증가로 대출 금리가 오르는 부작용을 낳기도 했다. 운영지침 제10조에 통화옵션거래에 따른 손실예상액 중 계약은행이 지원하기로 한 금액은 채권액에 포함한다는 조항이 들어 있기 때문이다.
익명을 요구한 전 시중은행 여신담당자는 “키코 사태 이후 윗선에서 기업들과 FTP를 체결하라는 지시가 내려와 지점에서 기를 쓰고 기업들을 찾아다녔다”며“정부에서 미는 정책이었다는 점도 있지만 FTP가 은행 이익에 도움이 되지 않았다면 그렇게까지 하진 않았을 것”이라고 말했다.
◇ FTP로 8.1조 지원했다는 정부 = 금융감독원은 이달 금융행정혁신위원회의 키코 지원현황 자료 요청에 따라 FTP 도입 이후 414개 키코 계약기업에 8조1000억 원을 지원했다고 회신했다. 지원금액은 신규여신 제공, 대출 전환, 만기연장, 금리인하 등 부문별로 은행별 실적을 단순합산한 것이다.
엠텍비젼을 비롯한 키코 피해기업들은 황당하다는 반응을 보이고 있다. 2010년 금감원이 마지막으로 공식 집계한 키코거래 손실 총액은 3조 2000억 원인데 그 두 배가 넘는 8조 원을 공급했다는 것 자체가 정부의 생색내기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특히 피해기업들은 FTP가 기업에 직접적으로 자금을 조달하는 역할을 거의 하지 못했다는 점을 지적하고 있다. FTP 지원의 대부분이 키코 손실금에 대한 대출로 기업에 실제 지급된 금액이 아니기 때문이다. 은행 내부 전산에서만 기업에 대한 대출과 동시에 은행 채무 변제가 동시에 이뤄진 셈이다.
실제 금감원이 언급한 8조1000억 원 중 키코 피해기업에 직접적으로 유동성이 공급돼 경영 정상화가 이뤄진 사례는 보기 드물다. 2010년 금융위원회는 키코 계약기업 등 628곳에 FTP로 6조2000억 원을 지원하고 있다고 밝혔다. 이 중 신규여신은 1조3040억 원으로 만기연장(3조 원), 대출전환(1조9000억 원)에 비해 작았다. 당시 신용보증기금과 기술보증기금을 통한 키코 피해기업 보증한도가 20억 원(보증비율 40%)으로 낮아 신규 대출이 가능한 규모 자체가 제한적인 점도 영향을 미쳤다.
지난해 말 기준 금융위 집계에 따르면 FTP에 가입한 7100여개 중소기업 중 48%(3400개)가 경영 정상화에 성공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키코 피해기업의 경우 FTP로 인한 수혜를 크게 누리지 못한 것으로 파악된다. 금융감독원이 지난 국정감사 때 정무위원회에 제출한 ‘은행별 키코 계약 기업’ 자료에 따르면 은행들이 파악 가능 한 업체 300여 곳 중 절반인 154개가 FTP에 가입했다. 그러나 이 중 절반 이상이 유동성 위기를 극복하지 못하고 워크아웃이나 기업회생절차(법정관리)를 추가로 진행했다. FTP만을 거쳐 현재 정상영업 중인 회사는 10% 내외에 불과한 것으로 추정된다.
현재 상장폐지된 한 코스닥 상장사 대표는 “FTP를 통한 유동성 공급 효과가 일부 있었지만 역효과가 더 컸다”며 “소액 신규대출을 받고 나면 더 이상 자금을 유통할 곳이 없어 주식시장에서 차입을 해야 했고 이로 인해 기업가치가 더욱 낮아졌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