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릴 때 대관령 아래 산촌에 살던 시절 배를 곯았던 기억은 크게 없지만 입에 단것은 늘 고프고 그리웠다. 겨울엔 설 무렵 엿을 고지만 봄부터 가을까지는 그런 것이 일절 없었다. 동네 어귀 삼거리 가게에 가면 눈깔사탕을 팔지만 그거야말로 그림의 떡이었다. 가게엔 사탕이 있어도 우리 주머니엔 사탕을 사 먹을 돈이 없었다. 또 사탕을 사 먹으라고 돈을 줄 부모님도 아니었다. 어머니 아버지가 특별히 모질어서가 아니라 그런 면으로는 어느 집 가릴 것 없이 그랬다. 왜 그랬는지 어른들 모두 군것질을 거짓말만큼이나 나쁘게 여겼다.
그렇다고 산촌의 아이들이 단맛을 아주 포기하는 것도 아니었다. 아이들은 아이들 방식대로 단맛을 찾았다. 봄이면 우리가 ‘뽐’이라고 부르던 삘기의 새순을 뜯어먹었고, 목화가 꽃을 피워 씨방이 통통해지면 목화 씨방을 뜯어 앞으로 솜이 될 녹색 섬유질을 질겅질겅 씹기도 했다. 그러면 그 안에서 조금은 들척지근한 푸른 단맛이 나왔다.
어른들 몰래 한여름 수수밭에 들어가 새파란 수숫대를 꺾어 그 안의 물기 가득한 푸른 수수깡을 질겅질겅 씹기도 했다. 사탕수수뿐 아니라 그냥 수숫대와 옥수숫대에도 그 안에 일정 분량의 당분이 들어 있었다. 푸른 옥수숫대를 꺾어 씹어도 들척지근한 단물이 나왔다.
수숫대를 씹다가?날카로운 수숫대 껍질에 입술을 베일 때도 많았다. 아무리 조심을 해도 혀와 입술 여러 군데에 상처가 나기 마련이었다. 그래도 단맛의 유혹을 떨쳐버리기 쉽지 않았다. 까짓것, 입술에 피 좀 나면 어때. 그동안 굶주렸던 단맛만 본다면 그런 건 문제가 되지 않았다. 피가 배어 나오는 입술로 아이들은 수수깡 속의 들척지근한 수액을 더욱 힘껏 쪽쪽 소리가 나도록 빨아대곤 했다. 그런다고 단물이 양껏 나오는 것도 아니었다.
어머니는 강릉 시내의 어느 부잣집 얘기를 할 때 “그 집은 설탕을 아주 포대째로 갖다놓고 먹는다”고 했다. 그 포대가 시멘트 포대만 하다고 했다. 나는 중학교에 들어가기 전까지 설탕 포대를 본 적이 없었다. 작은 봉지에 든 설탕만 봤지 설탕이 커다란 포대로도 나온다는 사실조차 몰랐다. 그때까지 내가 알고 있던 포대는 시멘트 포대와 비료 포대, 밀가루 포대 같은 것뿐이었다.
어쩌다 여름날 수박화채를 만들어 먹을 때에도 설탕이 너무 비싸서 사카린으로 만든 당원(糖源)을 썼다. 어릴 때 떡을 꿀에 찍어 먹고는 자랐어도 설탕을 마음껏 찍어 먹어 본 적이 없었다. 몇몇 설탕 생산국을 제외하곤 세계 각국의 일인당 국민소득과 일인당 설탕 소비량이 딱딱 맞아떨어진다는 걸 중학교 사회시간에 배웠다. 그 나라가 얼마나 잘사느냐를 설탕 소비량으로도 짐작할 수 있다는 얘기였다. 그것 역시 1970년대 초반의 얘기였다.
쌀과 연탄 다음으로 귀한 생필품이어서 물가가 오를 때 물가변동 주요 품목 안에 늘 설탕이 있었다. 그런 설탕이 물가지수 품목에서조차 빠진 지 오래라고 했다. 길거리에 단것은 여전히 범람해도 생활경제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있는 듯 없는 듯 줄었다는 얘기일 것이다. 설탕으로도 이렇게 한 시대의 모습이 흘러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