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재’답게 인문·사회·자연과학을 망라(網羅)한 주제로 55권의 저서를 낼 만큼 문필 활동도 활발하다. 칼럼 필자로도 이름이 높아 국내 한 신문에도 월 1회 좋은 글을 게재하고 있다. 하지만 두어 달 전에 쓴 ‘(조롱받는) 엘리트를 옹호하기 위해서’라는 칼럼에서 그는 내가 보기에도 매우 이상한 언급을 남겼다.
“엘리트라 불릴 자격이 있는 사람들의 권위를 떨어뜨리는 사람들은 대체로 서양에서 나타난다. 반면 동양에서는 엘리트의 자격을 얻기 위해 아무리 어려운 일도 해내고야 마는 사람들을 귀하게 여긴다”라는 대목이다.
우리나라(동양이 분명한!)에서도 ‘엘리트’들이 조롱의 대상이 된 지 오래인데, 외면은커녕 오히려 귀한 여김을 받는다고 한 것이 이상한 것이다. “지금 사회는 (엘리트의 충고와 조언은 제쳐놓고) 큰소리로 외쳐 대는 이들과 요란스러운 소동을 벌이는 사람들의 이야기에만 귀 기울인다. 본질이 아닌 가짜 문제에만 열을 올리며, 세상에 좋은 영향이라고는 줘 본 적 없는 이들만 따라다닌다”라는 분석에서 왜 우리나라는 제외했는가 말이다.
“SNS가 엘리트 조롱의 배경”이라는 지적도 마찬가지. 그는 “우민정치(愚民政治)는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를 지배한다. 그 속에서 터져 나오는 비루함에 대한 옹호는 익명성이 필연적으로 향해 갈 수밖에 없는 귀결이다 …. 많고 많은 정당이 이 선동을 진실한 기준으로 활용한다”는 진단도 내렸다. SNS가 만들어내는 여론에 대한 이해가 이처럼 높은 사람이 SNS 여론의 폐해를 논하면서 SNS 여론 강대국 대한민국을 제외한 것은 더 이상하지 않을 수 없다.
혹시 ‘엘리트 중의 엘리트’일 아탈리가 ‘한국에는 엘리트가 아예 없다’고 생각한 건 아닐까? 동양의 엘리트에 대한 그의 비현실적으로 이상한 분석과 진단에 대한 궁구(窮究)는 이런 의심으로 나를 이끌었고, 작금(昨今)의 한국 정황을 대입한 결과 이 의심은 근거가 충분했다.
아탈리에 따르면 엘리트는 ‘자신의 노력으로 취득한 학위와 성과에 의지해 현재 자리까지 올라온’ 사람들이다. 또 ‘엘리트들은 그 누구에게도 해를 끼치는 일 없이 우리가 사는 세상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친다’고 했다. 국회 청문회장과 청와대 일각에서 볼 수 있는 한국의 ‘엘리트’ 중 몇 사람이 이런 기준에 부합하나? 숱하게 많은 부적절한 처신의 흔적이 그들의 이마와 양 볼에 문신처럼 붙어 있지 않은가?
아탈리는 또 “엘리트는 엘리트가 되는 과정 중에 부자가 될 수도 있지만, 그것은 부차적인 문제다”라고 했다. 하지만 우리나라 ‘엘리트’들은 부자가 되는 것을 일차적인 목적으로 삼았기 때문에 이 기준으로도 진정한 엘리트가 될 수 없다.
‘한국에는 엘리트가 없다’고 본 아탈리가 신통하기만 하다. 그 멀리서 이런 결론을 내린 걸 보면 그는 엘리트가 분명하다. 아니면 한국의 실상은 전혀 모르고 있거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