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숭호의 키워드] 무슈, 아 퀴진!-남자들이여 부엌 앞으롯!

입력 2017-04-27 1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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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 코스카저널 논설주간

라사냐, 스파게티, 후추스테이크, 양파샌드위치, 두부조림, 꽁치김치찌개, 육개장, 미역국, 카레라이스. 나는 이 음식들은 만들 수 있다. 다른 이들에게 먹여 보았다. 맛있다고 한 사람들이 더 많았다. 노란색 기장과 흑미 섞은 쌀밥은 기본이고, 베이글과 잉글리시 머핀에 계란프라이, 치즈, 햄 따위를 끼워 넣은 샌드위치도 뚝딱뚝딱 그냥 만든다.

TV에서 ‘집밥 백선생’ 같은 요리 프로그램을 보고 배운 게 아니다. ‘요리하는 남자가 섹시하다’는 ‘요섹남’이란 요상하고 경박한 칭찬을 받으려고 한 것도 아니다. ‘백선생’ 백종원과 자칭 타칭 요섹남들이 TV 화면을 차지하기 훨씬 전, 2004년 12월에 한 신문에 실린 ‘남자들이여, 부엌을 점령하라’라는 칼럼이 나를 부엌으로 밀어 넣었고 칼을 잡게 했다.

그 칼럼의 요지는 이렇다. ‘개는 자신을 사랑해 주는 사람보다 밥 주는 사람의 눈치를 본다. 나이 든 남자도 아내 눈치를 보게 된다. 밥을 얻어먹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니 남자들이여, 더 늙기 전에 요리는 좀 해라. 부엌을 점령해라!’

눈치 볼 일, 구박받지 않고 평생을 살 자신이 넘침에도, 이 칼럼은 ‘부엌을 점령하라’라는 생각을 내게 불어넣었다. 내가 먹고 싶은 건 내가 해 보고 싶어서였다. 말솜씨가 요리 솜씨만큼 화려한 ‘셰프님’들이 가수, 배우, 개그맨들이 분장한 ‘먹천사’와 ‘먹요정’, ‘식신’과 ‘맛있는 녀석’들에 둘러싸여 채널마다 몇 개씩, 수십 번 되풀이해 보여 주는 ‘먹방’을 주름잡고 ‘레시피’와 ‘플레이팅’을 평가하는 미식평론가들이 TV를 장악하기 전에도 인터넷에는 무수히 많은 요리법이 숨은 고수들에 의해 소개되고 있었다. 하려 들면 못할 음식이 없었다. 그걸 뒤진 결과가 앞에 늘어놓은 나의 음식 목록이다.

나 말고도 많은 사람이 이 칼럼의 영향을 받았다. ‘부엌을 점령하라’, 이 일곱 글자를 포털에서 검색하면 정작 이 칼럼은 깊숙이 숨어 있고 다른 사람들이 비슷한 제목과 내용으로 쓴 글들이 줄줄이 떠오른다. 나도 오늘 키워드를 이걸로 하려다 워낙 같은 게 많아 머리를 쓴 끝에 ‘무슈, 아 퀴진(monsieur, a cusine)’이라는 걸 겨우 만들어냈다. ‘남자여, 부엌으로’라는 뜻의 프랑스 말이다. ‘테이블로 오너라’ 즉, ‘밥 먹자’라는 ‘아 타블르(a table)’를 변용해 보았다.

▲라사냐. 난 이런 거 만들 줄 안다.
▲라사냐. 난 이런 거 만들 줄 안다.

부엌을 점령한 남자들이 많아지면서 기백만 원이 넘는 식칼 세트나 이름조차 묘한 서양 향신료 세트를 주제로 대화를 나누는 남자들이 나타났다. 백화점, 온라인 쇼핑몰에서 주방가전, 요리 도구를 사들이는 남자들이 큰 폭으로 증가했다. 이 정도 영향이면 ‘명칼럼’이라 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남자와 요리’를 소재로 글을 쓰려고 십수 년 만에 이 칼럼을 찾아 다시 읽다가 내 모골이 송연해졌다. 마지막 세 줄이 여자들을 가만두지 않을 것 같아서였다. 그 세 줄은 이렇다.

“이미 나이 든 남자들은 (중략) 이제부터라도 ‘요리’를 배워 젊은 날 어쩔 수 없이 여자들에게 빼앗겼던 부엌을 탈환할 기회를 엿봐야 한다. 그러나 아내의 권력을 더욱 강화(?)해 주는 미련스러운 설거지는 안 된다. 오직 ‘요리’를 해야만 한다.”

설거지를 안 하고 음식을 만든다고? 이런 어불성설(語不成說)이라니! 어느 어진 아내가 있어 부엌을 난장판으로 만드는 남편이라도 좋다며 부엌에 들이겠는가? ‘설거지는 여자들이 하도록 하늘이 시킨 일’이라고 했다가 혼쭐난 스트롱맨 홍준표 씨와 교감이 있었나? 나도 오랜 세월, 이따금씩 ‘미련스럽게’ 설거지를 했었기에 부엌을 쓸 수 있는 ‘허락’을 받지 않았나? 내가 점령한 것이 아니라.

이 글을 이렇게 끝내야겠다. ‘부엌은 점령하는 게 아니다. 설거지부터 하면서 한 발씩 부엌으로 가는 거다. ‘무슈, 아 퀴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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