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역사를 통틀어 경제적으로 성공한 여성을 꼽는다면 단연 김만덕(金萬德· 1739~1812)을 들 수 있다. 1739년(영조 15) 제주에서 태어난 만덕은 10여 세에 부모를 잃고 오갈 데 없는 신세가 되자 어느 기생의 수양딸로 들어갔다. 만덕이 나이가 조금 들자 관아에서 그 이름을 기생 명단에 올렸다. 기생은 천인이었다. 만덕은 스물이 넘자 본인이 양인임을 관아에 호소해 가까스로 기생에서 벗어났다.
그 후 만덕은 객주 집을 운영했다. 객주는 숙박업의 일종이나 창고 등을 두고서 상인의 물건을 보관하거나 위탁받아 거간하는 중간상 역할도 가능했다. 만덕은 장사에 수완을 발휘해 물건이 흔하고 귀한 때를 잘 이용해 시세 차익을 남겼다. 점차 객주가 번창하면서 만덕은 제주에서 영향력 있는 거상으로 성장했고 돈도 꽤 모았다.
만약 만덕이 성공한 사업가에 그쳤다면 그 이름 석 자를 역사에 남기지 못했을 것이다. 만덕의 진짜 이야기는 지금부터다. 1792~1795년에 제주는 계속된 흉년으로 고통 받았다. 조정에서 급히 구호 곡식을 보냈으나 먼 바닷길을 건너온 곡식은 굶주린 백성을 구제하기에 턱없이 부족했다. 그마저 1794년에는 풍랑으로 도착하지 못해 제주 백성의 곤궁한 처지는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이웃의 참상을 목격한 만덕은 숙고 끝에 본인 재산을 희사했다. 전라도 상인에게 빨리 양식 500석을 사서 보내라고 부탁하고 여러 방법으로 배편을 동원해 제주로 운반했다. 당시 몇몇 제주사람이 기부한 규모가 100~300석이었다고 하니 만덕의 기부는 대단히 큰 고액 기부였다.
이듬해 제주 목사는 만덕의 선행을 정조에게 보고했다. 만덕의 선행을 훌륭히 여긴 정조는 그 소원을 들어주라는 특명을 내렸고 고사 끝에 만덕은 한양 대궐과 금강산을 구경하고 싶다고 말했다. 당시 국법은 제주 여성이 육지로 나오는 것을 금했다. 제주 인구를 일정 수준으로 유지하려는 정책 때문이었다.
그래서 정조는 만덕을 위해 편법을 써서 특별히 ‘내의원 의녀’의 직책을 내려 서울로 오게 했다. 이때가 1796년 가을, 만덕의 나이 57세였다. 서울로 온 만덕은 궐에 들어가 왕비에게 인사를 올리고 큰 상도 받았다. 그리고 이듬해 늦봄에 금강산을 구경하고 제주로 돌아갔다.
사람들은 만덕의 선행을 사랑하고 존경했다. 만덕이 서울에 오자 거금의 구휼미(救恤米)를 쾌척한 만덕의 이야기가 입에서 입으로 전해졌고 여러 고관이나 문사들이 앞다투어 만덕을 보길 원했다. 채제공(蔡濟恭)은 ‘만덕전’을 지어 주었고, 이가환(李家煥)도 “만덕은 제주의 기특한 여인일세/예순 얼굴이 마흔쯤으로 보이는구려” 하는 시를 지어주었다. 1840년 제주에 유배 온 추사 김정희(秋史 金正喜)도 큰 글씨로 ‘은광연세(恩光衍世·은혜의 빛이 세상에 퍼지다)’라 써서 그 후손에게 주었다. 기부가 가져온 사회와 역사의 선물이다.
공동기획: 이투데이, (사)역사 여성 미래, 여성사박물관건립추진협의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