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은 무직이다."
6일 서울중앙지법 417호 대법정. '왕실장'으로 불리며 박근혜 정권의 실세로 통했던 김기춘(78) 전 대통령 비서실장은 현재 직업을 묻는 재판장에게 이같이 답했다.
김 전 실장은 이날 서울중앙지법 형사30부(재판장 황병헌 부장판사)의 심리로 열린 자신의 1차 공판에 출석했다. 검은 정장에 회색 니트 차림을 한 그는 이전보다 한층 수척해진 모습이었다. 김 전 실장은 A4 용지 크기의 노란색 봉투를 들고 느릿느릿 걸어와 피고인석에 앉았다. 봉투에는 사건의 쟁점 등이 적힌 문서가 들어있었다. 그는 재판 중간중간 문서를 훑어보고 옆에 앉은 변호인과 귓속말을 하기도 했다.
함께 기소된 조윤선(51) 전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은 검은색 정장 차림으로 법정에 나왔다. 맨얼굴에 평소 쓰던 안경은 벗은 채였다. 재판장이 직업을 묻자 그 역시 "지금은 없다"고 말했다.
이날 김 전 실장과 조 전 장관은 혐의를 모두 부인했다. 김 전 실장의 변호인은 특검의 주장을 '잘못된 선입관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비판했다. 변호인은 "(특검의 논리는) 김 전 실장이 특정 예술인이나 예술 단체에 지원하는 국가보조금을 감축하거나 중단하는 정책을 시행했다는 것"이라며 "과연 국가가 보조금을 주지 않는 것이 예술의 자유를 침해하는지 생각할 필요가 있다"고 했다.
김 전 실장이 박근혜 정부에서 이른바 '왕 수석'으로 불릴 만큼 권한이 강했다고 해서 모든 책임을 물릴 수는 없다고 했다. 박 전 대통령과 최순실(61) 씨와 범행을 공모한 적도 없다고 강조했다. 변호인은 "김 전 실장은 최순실 등 국정농단 사건에 관여했을 거라는 근거 없는 추측에 따른 여론 재판과 정치적 표적 수사의 희생양"이라며 억울함을 표했다.
조 전 장관 측도 "정무수석실 소속 직원이 교문수석실의 지원 배제 업무에 협조했다고 해서 정무수석이었던 조 전 장관도 이에 관여했다고 볼 수 없다"고 주장했다. 정치적 사안을 무리하게 기소하려다 보니 특검이 잘못된 논리를 구성했다는 취지다. 조 전 장관도 직접 발언 기회를 얻어 "지금까지 제게 깊은 오해가 쌓여있었던 것 같다"고 말했다. 그는 "특검이 집에 참고인 압수수색을 왔을 때 철저히 수사해서 저에 대한 오해를 풀어줬으면 했지만 여기까지 왔다"며 "앞으로 제가 겪었던 모든 일을 있는 그대로 소상히 밝히기 위해 성심껏 변론에 임하겠다"고 밝혔다.
반면 특검은 "대통령 등 고위공직자들이 헌법과 법률에서 규정한 문화예술 분야의 직무 권한을 남용한 사건"이라며 목소리를 높였다. 청와대의 지시에 따라 조직적으로 자행된 심각한 범행이라는 것이다. 이용복 특검보는 "자신과 견해가 다르다는 이유만으로 지원을 배제해 예술의 본질적인 영역인 창작의 자유를 침해하고 문화적 다양성을 제한해 국민 모두에게 피해를 입혔다"고 강조했다. 그럼에도 김 전 실장 등이 '이념 투쟁의 수단'이었다고 주장하며, 사전검열의 심각성을 깨닫지 못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이날 재판이 끝난 뒤 김 전 실장은 여유로운 표정으로 변호인들과 악수를 나눴다. 중간중간 미소를 짓기도 했다. 그런 김 전 실장을 향해 한 방청객은 "부끄러운 줄 알라"고 소리쳤다. 조 전 장관은 남편인 박상엽 변호사를 향해 환하게 웃고는 법정 밖을 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