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정에 나란히 선 롯데그룹 총수 일가가 아버지 신 총괄회장에게 책임을 돌리면서 대부분의 혐의를 부인했다.
서울중앙지법 형사24부(재판장 김상동 부장판사)는 20일 특정경제범죄 가중처벌법 상 횡령 등의 혐의로 기소된 신 총괄회장, 신동빈(62) 회장, 신동주(63) 전 일본롯데홀딩스 부회장, 신영자(75) 롯데장학재단 이사장, 신 총괄회장의 셋째 부인 서미경(58) 씨 등에 대한 1차 공판기일을 열었다.
신동빈 회장 측에서 주장한 바를 요약하면 이렇다. 주요 혐의인 △롯데시네마 매점 불법 임대 △총수일가 급여 지급 등은 신 총괄회장이 가족들을 챙기기 위해 세세하게 지시한 것이었고, 가족과 일절 상의하지 않아 의사결정에 개입한 바 없다는 것이다. 신동빈 회장 측 변호인은 "신 총괄회장이 매점 중 수도권은 유미네, 지방은 영자네에게 나눠주라고 채정병 전 정책본부지원실 실장에게 직접 지시했다"고 언급했다.
나머지 두가지 혐의인 △계열사 주식 고가 매도 △롯데피에스넷 ATM 인수 등에 대해서는 경영상 판단에 따른 것이기 때문에 형사처벌 대상이 아니라고 주장했다. 이같은 방어전략은 횡령과 배임 혐의로 재판에 넘겨진 대부분의 기업 총수들이 내세우는 논리다.
신동빈 회장 등이 책임을 전가한 신 총괄회장은 뒤늦게 법정에 모습을 드러냈다. 신 총괄회장의 건강상태가 공식적인 자리에서 공개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한정후견 결정이 내려진 지난해 서울가정법원 심리는 비공개로 진행됐다. 신 총괄회장은 웅얼거리는 음성으로 "지금 뭐하는거냐", "내가 왜 여기 있나", "내가 키운 회사인데 왜 이런 재판을 하느냐" 등의 말을 반복하며 옆에 앉은 신동빈 회장을 계속해서 다그쳤다. 신 총괄회장 변호인은 "신 총괄회장이 재판 중인 것도 잘 모른다"고 재판부에 알렸다. 신동빈 회장은 아버지와 대화하면서 쩔쩔매는 모습을 보였다. 한국어가 서툰 신동주 전 부회장은 통역사를 통해 이 상황을 계속해서 전달받았다.
신동빈 회장 등의 주장에 따르면 모든 책임을 질 사람은 신 총괄회장인데, 신 총괄회장은 본인이 왜 법정에 있는지도 모르는 상황이다. 신 총괄회장 측은 "회사가 어려운 시기에 사재를 털어 회사를 도울지언정 손해를 끼친 일이 단연코 없다"며 "신 총괄회장은 고령으로 구체적인 업무 일선에서 떠난지 오래됐는데, 개별적이고 구체적인 사안까지 형사책임을 묻는게 과연 타당한지 되돌아봐야한다"고 강조했다.
신 총괄회장과 정상적인 의사소통이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확인한 재판부는 25분 만에 퇴정해도 좋다고 허가했다. 신 총괄회장은 자신의 건강을 살피는 의사와 수행원들이 "나중에 서면으로 보고해드린다고 합니다", "집무실로 안내해드릴 겁니다"라고 하는 말에도 휠체어를 멈추게 하고는 할말이 있다고 역정을 냈다. 신 총괄회장은 손에 들고 있는 지팡이를 휘두르면서 본인이 재판 받는 상황에 대해 불쾌감을 드러냈다. 검찰 수사조차 거부하다가 9개월 만에 모습을 드러낸 서 씨는 한 마디도 하지 않고 피고인석을 지켰다.
변호인들은 롯데쇼핑이 롯데시네마 매점을 임대하기로 한 결정을 배임행위로 보기도 어렵다고 말하기도 했다. 회사가 매점을 직영으로 운영해 한다는 전제로 검찰이 기소했다는 주장이다. 신 회장 등은 "배임이나 횡령은 계열사에 구체적인 손해가 발생해야 하고, 정책본부의 지시 방안이 개별적으로 손해를 끼쳤는지가 입증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향후 공판에서는 롯데그룹 정책본부의 의사결정구조와 집행과정이 집중적으로 논의될 것으로 보인다.
신 총괄회장은 858억 원의 탈세, 508억 원 횡령, 872억 원 배임 등의 혐의로 지난해 10월 불구속 기소됐다. 신 총괄회장은 롯데피에스넷 비상장 주식을 30% 비싸게 호텔롯데 등에 넘겨 총 94억여 원의 이익을 얻은 것으로 조사됐다.
신동빈 회장은 1249억 원대 배임과 500억 원대 횡령 혐의를 받고 있다. 검찰조사 결과 신 회장은 신 이사장과 서 씨 모녀에게 774억 원 상당의 일감을 몰아준 것으로 확인됐다. 부실화된 롯데피에스넷 유상증자에 계열사를 동원해 471억 원 상당의 손해를 끼친 혐의도 있다. 또 신 총괄회장과 함께 신동주 전 부회장 등에게 급여 명목으로 500억여 원을 부당하게 준 것으로 드러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