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른바 문화예술계 ‘블랙리스트’ 작성을 지시ㆍ주도한 혐의로 기소된 김기춘(78) 전 대통령비서실장이 첫 재판에서 혐의를 적극 부인했다. 비정상을 정상으로 돌려놓기 위한 정책을 범죄로 규정한 ‘정치적 사건’이라고 주장했다.
서울중앙지법 형사30부(재판장 황병헌 부장판사)는 28일 직권남용권리행사방해 등 혐의로 기소된 김 전 실장과 조윤선(51) 전 문화체육관광부 장관 등 4명에 대한 첫 공판준비기일을 열었다. 김 전 실장과 조 전 장관은 재판에 나오지 않았다. 공판준비기일에는 피고인이 출석할 의무가 없다.
김 전 실장 측은 이날 공소사실을 모두 부인했다. 김 전 실장의 변호인 김경종(63ㆍ사법연수원 9기) 변호사는 “자유민주주의적 기본질서 수호를 내세워 당선된 박근혜 대통령의 문화정책에 대해 반대세력이 잘못된 논리로 접근한 정치적 사건”이라고 말했다. 김대중ㆍ노무현 정부 10년을 거치면서 일부 세력에게 편향됐던 비정상적인 지원을 정상적으로 돌려놓은 것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김 전 실장 측은 △임용권자인 대통령이 1급 공무원의 사표를 받은 행위를 범죄로 볼 수 있는지 △청와대 수석비서관회의에서 김 전 실장이 발언한 말이 법률 위반에 해당하는지 △박근혜 정부의 문화예술정책만 범죄로 규정한 건지 등을 밝혀달라고 박영수 특별검사팀에 요구했다. 김 변호사는 “김대중 정부와 노무현 정부 당시에는 문화예술계의 지원 대상이 이념적으로 좌편향 돼 코드인사와 이념에 따른 지원이 극심했다”며 “이러한 행위도 모두 범죄라고 본 것인지 설명해 달라”고 했다. 최순실(61) 씨를 전혀 모르는 김 전 실장이 최 씨와 공모할 수도 없다고 주장했다.
‘블랙리스트’는 특검수사 대상이 아니라는 주장도 나왔다. 김 전 실장의 변호인 정동욱(68ㆍ4기) 변호사는 “특검에서 수사할 수 없는 사람을 수사해 구속시켰다. 위법수사”라고 주장했다. 이어 “구속돼 법정에 설 사람은 김기춘 전 실장이 아니라 직권남용한 특별검사”라는 자극적인 발언도 내놓았다. 앞서 특검 수사 과정에서도 김 전 실장은 같은 취지의 주장을 했다.
조 전 장관 측은 블랙리스트 작성에 직접 관여하지 않았다며 혐의를 부인했다. 조 전 장관 측은 “문체부 장관으로서 이를 미연에 방지하지 못한 과오가 적지 않다. 헌법과 역사 앞에서 반성한다”면서도 재판에서 법리를 다투겠다고 했다.
김 전 실장 등은 2013년부터 지난해까지 대통령과 최순실(61) 씨 등과 공모해 이른바 ‘블랙리스트’ 작성을 기획ㆍ주도하고 정부 비판적인 단체에 지원금을 주지 못하게 한 혐의로 기소됐다. 김 전 실장과 조 전 장관은 지난해 12월 국회 국정조사 청문회에서 블랙리스트 관련 거짓 증언을 한 혐의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