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 말의 명신 우탁(禹倬)은 강직한 선비였다. 그가 감찰규정으로 있을 때 충선왕이 상중에 부왕 충렬왕의 후궁을 간음하는 일이 벌어졌다. 이에 우탁이 백의(白衣) 차림으로 도끼를 들고 대궐로 들어가 패륜을 멈추라고 극간(極諫)한다. 도끼로 제 마음을 찍듯, 선비의 대쪽 같은 지조를 보여주는 지부상소(持斧上疏)였다.
1876년(고종 13년) 2월, 조선 말의 대표적인 유학자 면암 최익현(1834.1.14~1907.1.1)이 도끼를 들고 광화문 앞에 나타난다. 지부상소를 올리기 위해서다. 그는 일본이 조선 침략의 발판으로 삼은 강화도조약에 반발해 “차라리 내 목을 먼저 치라”며 광화문 앞에서 ‘도끼 상소’를 올린다.
최익현은 불의라고 판단한 것과는 결코 타협하지 않은, 위정척사론의 사상적 지주였다. ‘위정척사(衛正斥邪)’란 ‘올바른 것은 지키고 사악한 것은 배척한다’는 뜻이다. 여기서 올바른 것은 조선을 지배해온 성리학적 질서이고, 사악한 것은 서양과 일본의 문명을 가리켰다. 타협을 모르는 그는 상소로 인해 파직과 유배를 당하지만 개의치 않았다. 경복궁 중건으로 국가 재정이 파탄 났을 때도, 흥선대원군에게 아부하는 무리들이 판을 칠 때도 목숨을 건 상소를 올렸다.
그러나 일본의 집요한 조선합병 책략 앞에서 상소는 무력할 수밖에 없었다. 1905년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한계를 절감한 그는 투쟁 방식을 바꾼다. 그는 73세의 고령에 전북 태인에서 거병(擧兵)한다. 하지만 병력의 절대적인 열세로 실패하고 일본 쓰시마(對馬島)로 끌려간다. “왜놈이 주는 음식은 먹지 않겠다”며 단식하다가 그곳에서 최후를 맞는다.
위정척사론의 신봉자였던 그를 두고 세상 물정 모르는 완고한 유학자라고 할 수도 있다. 하지만 조선이 영원하길 바랐던 충절마저 부정할 수는 없을 것이다.
김대환 편집위원 daehoan30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