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주는 따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 안에 있다. 천주를 마음속에 모시고 있는 인간은 신분이나 빈부, 적서(嫡庶), 남녀 등의 구분에 관계없이 모두 평등하고 수행을 하면 군자가 될 수 있다.”
1860년대 조선 말기 도탄에 빠진 백성들이 각지에서 농민 봉기를 일으키면서 사회 불안은 더욱 확산되고 서구 열강의 중국 침략 등으로 외세에 대한 위기감과 서학에 대한 반감이 커지고 있었을 때, 수운(水雲) 최제우(崔濟愚, 1824. 12.18~1864. 4.15)는 민족 고유의 경천사상을 바탕으로 유·불·선사상과 도참사상, 후천개벽사상 등의 사상을 융합해 동학을 창시했다. 동학은 후에 천도교로 개칭했다.
몰락한 양반의 후예로 재가녀의 자식이라는 사회적 차별을 받았던 최제우는 10세에 어머니를 여의고 17세에 아버지마저 숨지자 3년상을 마친 뒤 10여 년을 전국 각지를 유랑하며 다양한 경험을 했다. 이때 한 승려에게서 ‘을묘천서(乙卯天書)’라는 비서(秘書)를 얻어 신비체험을 했다. 구도의 길로 접어든 그는 제선(濟宣)이라는 이름을 ‘우매한 백성을 구제한다’는 뜻의 제우로 고쳤다.
그의 포교 활동기간은 득도한 이듬해인 1861년 6월부터 체포된 1863년 12월까지 약 1년 반 정도로 짧았지만 접소가 14곳, 신도 수가 3000여 명에 이르렀다. 체포된 이듬해 ‘삿된 도로 정도를 어지럽혔다’[左道亂正]는 죄로 대구에서 참형 당했다. 이때 그의 나이 41세였다.
경주 가정리 구미산에 묘가 있으며 용담정, 포덕문, 최제우 동상, 최제우 유허비 등 유적이 모여 있어 ‘천도교 용담성지’로 일컬어지고 있다. 울산 중구 유곡동에는 최제우가 여시바윗골에서 수도생활을 하다가 천서를 받고 크게 깨우친 ‘수운 최제우 유허지’가 있으며 ‘예수바우골’이라 해 동학의 성스러운 땅으로 알려져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