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경아의 라온 우리말터] 강술 부르는 씁쓸한 연말

입력 2016-12-14 10:18 수정 2016-12-14 10: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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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 시절 최고의 크리스마스 선물은 과자종합선물세트였다. 아버지께선 크리스마스 전날 항상 갓 튀긴 통닭과 빨간색 과자 상자를 들고 퇴근하셨다. 술이 거나한 날에는 캐럴을 부르며 과자를 내놓으셨다. 우리 다섯 남매는 자는 척하다 벌떡 일어나 속옷 차림으로 둥그렇게 앉아 통닭과 과자를 먹었다.

중고등학교 땐 선생님이나 친구들 생일날, 초코파이에 초를 꽂고 축하 노래를 불렀다. 값비싼 케이크에 비해 보잘것없었지만 교실엔 웃음꽃이 만발했다. 대학에 다니던 1980년대 후반엔 동아리 방이나 자취하는 친구 집에 모여 새우깡에 강소주를 마시며 밤새 칼 마르크스, 마오쩌둥, 헤르베르트 마르쿠제, 이른바 ‘3M’의 사상에 대해 논쟁하곤 했다.

과자에 대한 추억이 풍성하다. 특히 새우깡은 1971년 출시됐으니 불혹을 지나 곧 지천명을 맞는다. 붕어빵에 붕어 없고, 칼국수에 칼 없지만 새우깡엔 새우(농심에 의하면 한 봉지에 서너 마리 들어 있다)가 있어 가난한 대학 시절 술안주로 그만이었다. 휴강 등으로 생각지 않은 시간이 생기면 “깡소주에 새우깡!”이란 구호가 여기저기서 들릴 정도였다. ‘깡’이 주는 다소 강하지만 구수한 말맛이 참 좋았다.

그런데 ‘깡소주’는 바른말이 아니다. 소주보다 더 독한 술로 느껴지지만 규범에 맞는 표기는 ‘강소주’이다. 여기서 ‘강-’은 ‘다른 것이 섞이지 않은’, ‘그것만으로 된’ 등의 뜻을 더하는 접두어다. 따라서 강소주는 독한 소주가 아니라 ‘안주 없이 마시는 소주’를 뜻한다. 꼭 소주가 아니라도 술적심(숟가락을 적시는 것으로, 국이나 찌개 등 국물을 뜻함) 없이 마시는 술이면 ‘강술’이다.

이처럼 다른 것이 섞이지 않아 순수함을 더하는 ‘강’이 붙은 말로는 강밥(국이나 반찬 없이 먹는 맨밥), 강조밥(좁쌀로만 지은 밥), 강참숯(다른 나무의 숯이 조금도 섞이지 않은 참나무숯), 강풀(물에 개지 않은 된풀) 등이 있다.

강추위의 ‘강’은 ‘메마름’을 뜻한다. 즉, 강추위는 눈이 오지 않고 바람도 불지 않으면서 몹시 매운 추위를 일컫는다. 따라서 강추위는 반드시 맑게 갠 날씨여야 한다. 반면 요즘 일기예보에 자주 등장하는 ‘강(强)추위’는 한자어로, 고유어 강추위와는 의미가 다르다. ‘눈이 오고 매운바람도 부는 심한 추위’를 가리킨다. 어느 순간 강(强)추위가 우리말 강추위를 밀어냈지만, 예전엔 겨울 하면 ‘마른 추위’만 존재했다.

강더위 역시 ‘마른 더위’를 뜻한다. 비가 내리지 않고 볕만 내리쬐는 더위다. 강기침(마른기침), 강마르다(살이 없이 몹시 마르다), 강서리(늦가을에 내리는 된서리) 등의 강도 모두 ‘물기 없이 마른’의 의미를 더한다.

이밖에도 아이가 눈물 없이 앙앙 소리 내어 우는 ‘강울음’, 까닭 없이 꾸짖는 호령인 ‘강호령’처럼 접두어 ‘강’은 억지스럽다는 의미를 얹기도 한다.

최순실 게이트로 박근혜 정부의 민얼굴이 드러나면서 ‘홧술족’이라는 신조어가 등장했다. 참을 수 없는 분노와 상실감을 술로 해결하려는 이들로 인해 양주, 소주 등 독주 매출이 전년 대비 각각 10% 정도 증가했단다. 이래저래 술을 부르는 씁쓸한 연말이다. 그래도 건강을 위해 강소주 등 강술은 피해야 한다. 술은 가벼운 마음으로 좋은 사람과 즐거운 대화를 나누며 기울여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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