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로와 신호등을 이용하고 어두운 저녁에는 가로등의 덕을 봅니다. 그뿐인가요. 공공의 권력인 경찰은 치안을 보장하고, 지금 이 순간에도 국방의 의무를 다하는 젊은 군인 덕에 우리는 안녕을 누리고 있습니다.
이들은 이른바 공공재(public goods)입니다. 누가 독점할 수 없는, 사회를 구성하는 우리 모두의 것이지요. 모든 국민이 충직하게 납세의 의무를 다했기에 얻을 수 있는 공공의 재산이기도 합니다. 반대 의미는 사유소비재(private goods)입니다. 이름 그대로 누군가, 즉 특정인의 소유가 인정됩니다. 사유재를 얻으려면 그에 맞는 금전적 지출이 필요합니다. 원하는 사람만 지출하고 얻을 수 있지요.
TV방송은 어떨까요? 지금 이 순간에도 수백 가지의 채널이 부지런히 돌아가고 있습니다. 방송사에서는 내 의지와 선호도에 따라 프로그램을 만들지 않습니다. 아무리 “이런이런 드라마 좀 만들어 봐요”라고 한들, 그들이 내 입맛에 따라 프로그램을 제작할 리 없습니다.
불특정 다수를 위한 TV방송은 엄연한 공공재입니다. 기차역과 버스터미널에서 또는 스마트폰으로 TV를 볼 때 돈을 내는 사람은 없습니다. 준조세 성격의 ‘시청료’가 수십 년째 논란이 된 것도 이런 이유입니다.
언론학의 수많은 교과서와 논문도 공공재로서 ‘방송의 역할’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방송 소비자, 즉 시청자에게 방송이란 국가적 재난이나 특정 이슈에 국한되지 않아야 합니다. 국민에게 균등하게 시청권이 주어져야 한다는 의미지요. 정부 역시 보편적 시청권을 위해 한때 ‘난시청 해소’를 공중파 방송에 주문하기도 했습니다. TV방송은 치안을 담당하는 경찰, 나라를 지키는 국방과 함께 우리가 누릴 수 있는 공공재입니다.
언론 역시 뉴스의 유료화라는 궁극점을 향해 달리고 있습니다. 그러나 사회 감시자라는 언론의 책임, 즉 공공재로서의 역할도 함께 고민하고 있습니다.
최근 지상파TV가 유료방송에 공급하는 프로그램의 재송신료(CPS) 논란이 불거졌습니다. 미래창조과학부와 방송통신위원회는 “재송신료를 올리거나 내릴 때 근거자료를 명확히 제시해야 한다”며 권고안을 내놨습니다. 이른바 ‘가이드라인’입니다.
규제나 정책이 아닌, 실효성 없는 권고안인 셈이지요. 동시에 이로 말미암아 발생하는 문제에 대해 책임지지 않겠다는 면피용 정책이기도 합니다.
미래부와 방통위는 이에 대해 “기업과 기업의 거래를 정부가 규제할 수 없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이게 웬일인가요. 정부는 이제껏 전력과 정유산업, 방위산업 등에 꾸준히 규제를 내놓았습니다. 이들이 뚜렷한 공공재이기 때문이지요. 그러나 같은 공공재인 방송에만 소극적입니다.
각각의 목적은 다르지만 지상파와 케이블방송 모두 정부의 소극적인 태도를 질타하고 있습니다. 합리적 절충안과 보편적 시청권을 모두 감안한 정책이 필요하기 때문이지요. 그런 정책을 만드는 게 공무원의 역할입니다. 관련 부처가 내놓은 가이드라인은 한마디로 ‘미안해. 사실은 우리 일 안 하고 놀았어’라는 허울 좋은 핑계일 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