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때는 프랑스 사회가 1년 중 가장 활기를 띠는 시기다. 대자연의 품 안에서 또는 평소와는 다른 환경에서 ‘신성한 바캉스’를 즐기면서 심신을 재충전한 휴가객들이 일터로 돌아오면서 프랑스 사회의 각 분야는 에너지가 넘쳐 흐른다. 각급 학교는 새 학년도를 맞이하고 사회 각 분야의 활동은 재개된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이번 가을은 프랑스 정계에는 ‘랑트레의 전투’라고 할 정도로 여름 못지않게 뜨거운 계절이 될 전망이다. 내년 봄(4월 1차, 5월 결선)에 대선이 예정돼 있기 때문이다. 프랑스 대통령은 한국과 마찬가지로 국민의 직접선거로 선출된다. 임기는 5년이며, 2008년 개헌으로 1회 연임이 가능하다. 또 한 가지 우리와 다른 것은 프랑스 대선은 프랑스의 다른 선거와 마찬가지로 2차 결선 투표가 있다. 1차 투표 결과 과반수 득표자가 없는 경우 다득표자 2인을 대상으로 결선투표를 실시한다. 1965년 대통령 직선제 부활 이후 치러진 모든 선거에서 1차 투표에서 과반득표자가 나온 경우는 아직 없었다. 과반수 득표자가 대통령이 될 수 있게 한 2차 투표의 실시는 대통령의 정통성을 담보하는 외에 극우정당 등 포퓰리스트(대중인기영합주의) 정당 후보의 당선을 어렵게 만드는 장점이 있다.
정권 탈환에 큰 기대를 거는 우파 진영에서는 석 달 후의 경선이 마치 대선 본선인 양 벌써부터 열기가 대단하다. 니콜라 사르코지 전 대통령(61)은 야당인 공화당 대표직을 사임하고 지난 22일 대통령 출마를 공식화했다. 2012년 대선서 재선에 실패한 사르코지 전 대통령의 출마 선언은 이미 예고되어 있었던 것이나 그는 이번에 출간된 자신의 저서 ‘프랑스를 위하며 모든 것을’의 서문을 통해 출마 선언을 했다. 그러나 그가 11월 20일과 27일로 예정된 우파 경선에서 최대 라이벌인 알랭 쥐페 보르도 시장(71, 전 총리)을 누를 수 있을지는 확실치 않다.
현재 경선 여론조사에서 사르코지(45%)를 10%포인트 앞서고 있는 쥐페는 우파 진영에서는 신망이 높은 원로 정치인으로 경선 출마를 위해 고전하고 있는 나탈리 코시위스코-모리제 전 환경장관의 지지 운동에 나설 정도로 여유를 보이기도 했다. 경선에 입후보하기 위해서는 내달 9일까지 국회의원 20명을 포함한 선출직 정치인 250명과 2500명 당원의 서명을 받아야 한다.
집권 좌파의 경우 관례대로라면 프랑수아 올랑드 현직 대통령(62)이 경선 없이 출마하는 게 당연하다. 그러나 이번에는 사정이 좀 다르다. 아직도 반신반의하는 사람들이 있으나 사회당 지도부가 내년 1월 대선 예비 후보자 경선을 실시하겠다고 결정했기 때문이다. 현직 대통령이 재출마를 위해 경선에 참여한다면 이는 프랑스 정치 사상 초유의 일이 될 것이다. 이러한 상황이 초래된 것은 10%대까지 내려간 올랑드의 기록적인 지지율 하락이 원인이다. 올랑드 대통령은 실업률이 ‘신뢰할 수 있을 정도로’ 하락해야 재출마를 고려하겠다며 이에 대한 결정을 12월로 미루고 있다. 그런데 지난 18일 프랑스 국립통계청(l’Insee)은 2분기 프랑스 본토 실업률이 전 분기보다 0.3%포인트 하락한 9.6%를 기록했다고 발표했다. 해외 영토를 포함했을 때도 프랑스 실업률은 9.9%로 10% 이하로 내려갔다. 프랑스 실업률이 10%선을 무너뜨린 건 2012년 이후 4년 만에 처음으로 이는 올랑드에게는 일대낭보다. 공영 TV 프랑스2는 29일 올랑드의 재출마 가능성이 “매우 크다”고 보도했다.
그러나 올랑드는 (대선에서) 경제 실적이 중요하기는 하나 “결정적인 것은 아니다”라고 주장한다. 그는 “세계적인 현상이 된 권위주의의 유혹”에 맞서 “민주주의의 수호자 역할을 자임하겠다”고 한다. 지난번 선거 때 구호로 내세웠던 ‘정상적인 대통령(un presidentnormal)’과 일맥상통하는 논리다. 그러나 경제 실정과 계속되는 테러로 국민의 대정부 신뢰가 바닥을 치고 있는 상황에서 이런 구호가 또다시 효력을 발휘할지에 대해서는 회의적인 시각이 적지 않다. 지난 7월 탐사 보도로 유명한 주간지 ‘카나르앙셰네(Le Canard Enchaine)’가 올랑드 대통령의 전용 이발사의 봉급이 각료급 수준인 월 9895유로(약 1200만 원)라는 사실을 폭로해 그의 ‘보통 대통령’의 이미지에 큰 타격을 준 것도 악재이다.
한편, 아르노 몽트부르 전 산업부장관 등 올랑드 정부에서 각료를 지낸 인사들이 3명이나 대선 출마를 선언해 좌파 진영도 혼전 양상을 보이고 있다. 이런 와중에 프랑스 대선 정국에 새로운 변수로 등장하여 국내외적으로 주목을 받고 있는 정치 신인이 있다. 화제의 주인공은 30일(현지시간) 전격 사임한 에마뉘엘 마크롱 경제장관이다. 불과 38세인 그는 프랑스 엘리트의 산실인 ENA 출신의 테크노크래트다. 국립행정학교로 번역하는 ‘ENA’는 프랑스판 고등고시 제도로 ENA 출신들은 관계는 물론 프랑스 정계와 재계에도 포진하고 있다. 마크롱은 경제부를 거쳐 민간 투자은행 로칠드(Rothschild & CieBanque)에서도 근무했던 특이한 경력의 소유자다. 2012년 취임한 올랑드 대통령은 그를 대통령실 부실장으로 발탁했고 2년 3개월 만에 경제장관으로 승진 기용했다. 그는 올랑드의 사회당 정권에서 우클릭을 상징하는 인물이다. 일요일과 심야 영업 제한을 푸는 ‘마크롱법’(2014년)이 그의 대표적인 업적이다. 프랑스에 살아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일요일에 백화점이 문을 닫아 불편을 겪은 경험이 있을 것이다. 이 문제는 강성 노조의 완강한 반대로 역대 정권이 손댈 엄두를 못 내던 사안이었다. 이외에도 마크롱은 사회당의 상징과도 같았던 주 35시간 근로제를 완화하는 노동법 개정에도 주도적으로 관여했다. 그 덕분에 계란 세례를 받기도 했다.
올 4월 그는 “좌파도 우파도 아닌 새로운 정치 운동을 시작하겠다”며 ‘앙 마르슈(enmarche·나가자)’란 조직을 발족했다. 그는 이어서 5월 8일에는 프랑스 중부 도시 오를레앙에서 개최된 잔 다르크 축제에 주빈으로 초청됐다. 프랑스 언론들은 이 행사가 지니는 상징성에 특별한 의미를 부여했다. 마크롱은 이날 기념사에서 백년전쟁 때 프랑스를 구출한 영웅 잔 다르크를 ‘진보와 통합의 인물’로 규정하여 눈길을 끌었는데 영국 일간 인디펜던트는 마크롱을 21세기 프랑스의 ‘자칭 메시아(self-appointed messiah)’라고 호칭했다.
현재 앙 마르슈에는 5만5000명이 회원으로 가입했다. 이 중 1만6000명이 올 여름 10만 가구를 방문해 직접 의견을 청취했다.
‘라그랑드마르슈’라고 명명한 마크롱 정치 여정의 시작이다. ‘라 그랑드 마르슈(la Grande Marche)’는 큰 행군이란 뜻으로 ‘장정(長征·la Longue Marche)’을 연상시킨다.
뉴욕타임스는 마크롱에 대해 ‘우상파괴주의자(iconoclast)’라고 규정했고, 영국 더타임스는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다음 지도자?(Emmanuel Macron: France’s next leader?)’라는 제하의 기사에서 마크롱이 기업인들을 백안시하고 여자를 장식품으로 보는 프랑스 사회당 정부에서 경제장관이라는 사실은 매우 탈관습적(unconventional)이라고 논평했다.
마크롱은 19일 휴가 중 방문한 프랑스 중서부 방데 지역에서 기자들에게 “나는 사회주의자가 아니다”라고 선언했다. 마크롱의 탈이념 노선이 그의 차기 대선 출마 여부와 함께 좌우대결 구도이던 프랑스 정치에 어떤 영향을 줄지 귀추가 주목된다. 또 선거 경험이 없는 그가 프랑스 정계의 노장들과의 전투에서 승리해 자신이 꿈꾸는 ‘장정’을 할 수 있을지 국내외의 이목이 집중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