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 왕 루이 16세(1754.8.23~1793.1.21)는 루이 15세의 둘째 손자다. 1761년 세손(世孫)인 형 부르고뉴 공작 루이 조제프 자비에가 사망한 데 이어 4년 뒤 아버지인 세자 루이 페르디낭도 사망했다. 1770년 오스트리아의 왕녀 마리 앙투아네트와 결혼한 루이 16세는 1774년 루이 15세에 이어 왕위에 올랐다.
초기엔 존경받는 왕이 되려고 노력했지만, 그는 너무 소심하고 나약했다. 프랑스의 정치철학자 알렉시스 드 토크빌은 ‘앙시앵 레짐과 프랑스혁명’이라는 저서에서 “루이 16세의 죽음을 부른 것은 역설적으로 부르봉 왕가였다”고 평했다. 루이 14세 말기에 시작된 재정 악화는 점점 더 나빠져 루이 16세가 즉위할 즈음에는 여러 국가에서 돈을 꿔 재정을 메우는 형편이었다. 특히 영국의 팽창을 저지하기 위해 미국 독립전쟁에 관여해 미국을 지원하느라 최악의 상태였다.
이에 루이 16세는 면세특권 폐지, 과세 평등을 추진했다. 사제와 귀족 등이 반발하자 1787년 명사회를 소집해 재정개혁을 단행하려 했다. 하지만 고등법원마저 ‘귀족혁명’이라고 반발했다. 할 수 없이 1789년 5월 국민의 동의를 얻기 위해 삼부회를 소집했지만, 이를 통해 왕족과 귀족은 시민계급으로부터 재정 지원을 받으려 했고 시민계급은 권리를 주장하고자 했다.
같은 해 6월 시민계급 대표들은 성직자 및 평민 대표 일부와 힘을 합쳐 테니스 코트에 모여 프랑스 헌법을 제정할 때까지 해산하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루이 16세가 군대를 동원해 제지하려 하자 군중이 폭동을 일으키고 바스티유 감옥을 습격해 프랑스혁명이 발발했다.
루이 16세는 결국 10월 6일 시민들에게 붙잡혔다. 이후 1791년 6월 파리를 탈출하려다 체포돼 2년 뒤 단두대에서 처형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