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가 노조의 동의 없이도 ‘사회 통념상 합리성’만 있으면 임금체계 개편이 가능하다는 해석을 내놓았다. 공공기관에 이어 민간기업도 성과연봉제를 본격적으로 확산시키겠다는 의도로 보인다. 노동계는 당장 노동법의 근간을 흔드는 행태라며 강하게 반발했다.
고용노동부는 17일 현장에서 노사가 임금체계의 방향과 방법을 더욱 쉽게 알 수 있도록 ‘임금체계 개편을 위한 가이드북’을 발간했다고 밝혔다.
가이드북은 임금체계 개편의 방향에 대해 ‘연공급을 완화하면서 직무ㆍ능력ㆍ성과급 등의 비중을 확대하는 것’ 이라며 임금체계 개편의 구체적인 방법은 다양하게 나타날 수 있다고 강조했다.
가이드북에서는 업종, 규모, 문화 등 기업의 여건, 근로자들의 선호 등 사업장의 여건에 맞춰 개편을 추진할 수 있도록 직무급, 직능급, 역할급 등 전형적인 방법 외에도 차등승호제, 성과연봉제 등 연공성을 완화하면서 성과주의를 가미하는 다양한 방법을 제시했다.
임금이 근속연수에 의해 결정되는 호봉급과 달리, ‘직무급’은 직무 특성(난이도ㆍ업무 강도ㆍ책임 정도ㆍ요구되는 기술)에 따라 ‘직능급’은 근로자의 직무 능력이나 숙련 정도에 따라, ‘역할급’은 조직 내에서 해당 직위 또는 직무를 담당하는 근로자가 수행해야 할 책임, 미션 등에 따라 임금이 결정된다.
다만 연공 중심의 임금체계가 일자리 부족, 고용 불안, 노동시장 격차 확대 등 원인인 만큼 임금체계 개편이 시급하다고 강조했다. 우리나라의 호봉제 비중은 2009년 72.2%에서 지난해 65.1%로 낮아졌지만, 아직은 호봉제가 지배적인 임금체계이다.
직무ㆍ직능급이나 연봉제를 도입한 사업장도 많지만, 실제로는 연공서열에 따라 임금체계를 운영하는 곳이 대다수다. 진정한 의미의 성과 중심 임금체계와는 거리가 멀다는 것이 고용부의 판단이다. 그 결과, 1년 미만 근속자 대비 30년 이상 근속자의 임금수준은 3.3배에 달해 유럽연합(EU) 15개국 평균(1.7배)이나, 우리와 임금체계가 비슷한 일본(2.5배)보다 훨씬 높다.
이러한 연공 중심 임금체계로 대기업의 고액 연봉 체계가 굳어져 중소기업 정규직의 임금이 대기업 정규직의 49.7%에 불과할 정도로 노동시장 격차가 확대됐다고 지적했다.
가이드북은 연공 중심 임금체계를 개편하기 위해 노조와의 충분한 협의가 필요하지만, 불이익 변경인 경우 근로자 과반수(또는 과반수 노조)의 동의가 없더라도 사회통념상 합리성이 있으면 취업규칙 변경이 가능하다고 해석했다.
취업규칙은 채용, 인사, 해고 등과 관련된 사내규칙을 말한다. 근로기준법은 근로자에게 불이익을 주는 취업규칙 변경은 노조나 근로자 과반수의 동의를 받도록 규정했다.
사회 통념상 합리성의 판단 기준으로는 △근로자의 불이익 정도 △취업규칙 변경 필요성의 내용과 정도 △변경된 취업규칙 내용의 타당성 △다른 근로조건의 개선 여부 △노조 등과의 충분한 협의 △동종 사항의 국내 일반적인 상황 등을 제시했다.
임서정 고용부 노사협력정책관은 “임금체계 개편은 정년 60세 의무화 입법에 따라 노사에게 책무로 부여된 사안”이라며 “가이드북 배포과 함께 사례 발표대회, 토론회 등으로 노사가 임금체계 관련 지식과 정보를 접할 기회를 넓혀 나가겠다”고 말했다.
하지만 노동계는 취업규칙 변경은 근로자 과반수 동의를 얻어야 변경할 수 있도록 현행법에 규정된 만큼 사회 통념상 합리성이라는 모호한 기준으로 이를 뒤엎을 수 없다며 강력한 반대의사를 밝혔다.
김준영 한국노총 대변인은 “법원이 극히 예외적인 경우에만 사회 통념상 합리성이라는 기준을 인정하는데, 마치 보편적인 기준인 것처럼 제시한 것은 행정부의 월권에 지나지 않는다” 며 “정부가 불법으로 성과연봉제 확산을 꾀할 경우 소송 제기 등 법률 투쟁으로 맞서겠다”고 말했다.
민주노총도 “직무ㆍ성과급으로의 임금체계 개편이 장기근속자들의 임금 삭감과 퇴출 방안이자 노조 무력화를 노리는 불법지침임에도 정부는 경제, 노동시장, 노사 및 미래세대들의 어려움과 청년 신규 채용 문제 해결을 위한 만병통치약으로 말하고 있다”면서 가이드북의 즉각 폐기를 촉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