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적으로 평가받았던 학창 시절에는 반장 선거에서 번번이 남자애들에게 지는 것 말고는 여성임을 별로 자각하지 못했다. 사회 생활을 시작하자 달라졌다. 조직에서는 극소수였고 남성 중심적인 질서에서 여성성은 불편함으로 자각됐다. 중성적으로 보이려 무던히도 애썼다. 머릿속으로 ‘내가 남성이었으면’ 하고 생각했다는 걸 부인하기 어렵다.
여성성을 제대로 느끼게 된 것은 결혼과 출산, 육아라는 여성 고유의 임무를 수행하면서부터였다. 일단 생물학적 불리함은 피할 도리가 없었고 “여성은 애 낳고 나면 전투력이 떨어진다”는 소리를 들으며 사회적인 불리함도 감수해야 했다.
여성이라는 이유로 여성 관련 기사를 쓰게 되는 경우는 더 많이 생겼다. 경험은 양날의 칼이다. 매우 현실적인 접근을 할 수도, 오히려 편견에 사로잡힐 수도 있다. 나는 반가웠다. 균형 잡기를 하면서 생생한 경험들을 전하는 주체가 되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러자 깨고 싶은 것들이 너무도 많이 보였다.
우선 여성에 대해 경직돼 있는 미디어의 프레이밍(framing: 틀짓기)이 그렇다. 한때 유행했던 ‘알파걸’이니 ‘여성 최초’ ‘파워 우먼’류의 기사는 허망했고, 기껏해야 여성의 승진을 가로막는 ‘유리천장 부수기’ 정도가 대부분이었고, 그 이후, 그 이상이 없다는 점이 안타까웠다.
성공한 여성의 화려함과 노고에 대한 찬사는 이제 그만해도 된다. 문제는 힘들게 유리천장을 뚫고 올라간 여성의 후임이 다시 남성이 되는 경우에 대한 보도가 극히 적다는 점이다. 이 문제를 제기하면 “그 자리에 앉힐 만큼 능력과 경험이 있는 여성이 없다”는 답이 돌아오곤 한다. 어느 정도 현실이긴 하다.
이 정부가 그나마 여성 인재의 활용이 국가 경제 발전으로 이어진다며 ‘시간선택제 일자리’도 만들었지만 그건 아이를 돌보면서 유연하게 근무할 수 있도록 배려한 ‘고급 아르바이트’이다. 정규직 일자리에서 경력 단절 없이 남성과 동등하게 성장하고 싶은 여성을 위해, 재취업하려 해도 저임금ㆍ장시간의 일자리밖에 안 보이는 싱글맘 가정에 적합한, 차원 높은 국가 정책이 필요하다. 개인이나 조직의 배려로는 불가능하다. 그런 점에서 나는 여성이 기업에서든 공직에서든 ‘다양한 다수’가 포진할 때까지는 할당제를 실시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래야 후임 양성도, 여성에 대한 입체적인 이해도 가능해진다.
온정주의적 프레이밍도 없애야 한다. ‘3월이면 워킹맘 발 동동’ 같은 기사도 들여다보면 어린이집이나 학교에 입학하는 아이들 때문에 엄마들이 소환되므로 ‘안됐다’는 결론인 경우가 많다. 일과 가정의 양립을 완벽하게 해내는 슈퍼우먼은 없다. 특수한 환경에서 그것이 가능할지는 몰라도 대부분의 경우 기회비용을 치러야 한다.
정치 기사에서의 여성 보도 프레이밍은 더 진부하다. 여성 정치인을 평가할 때 “누가 더 예쁘냐” “저 사람은 너무 드세지 않으냐” 등의 잣대가 무비판적으로 적용된다. 말은 행동과 사고를 규정한다. 아무리 술자리 농담이라고 해도, 특히 미디어 종사자라면 “나는 모 여성 정치인이 예뻐서 좋아(지지해)”와 같은 말은 절대 해선 안 된다고 생각한다. 의식적으로라도 그 여성 의원의 법안 발의, 공약 내용을 떠올려주기 바란다.
뉴욕타임스(NYT) 첫 여성 편집국장을 지낸 질 에이브럼슨은 최근 폴리티코 팟캐스트에 출연해 흥미로운 주장을 했다. 미국 민주당 대통령 후보 경선에 나선 힐러리 클린턴 후보가 여성이기에 남성에 비해 가혹하게 조사ㆍ평가받고 있다는 것. 여성은 훨씬 더 청렴할 것을 요구받으며 높은 자리에 오를수록 호감도가 떨어진다고도 했다. 에이브럼슨이 자신의 전임 빌 켈러보다 적은 연봉을 받는다며 시정을 요구하다 잘린 것은 잘 알려진 사실. 감정에 호소한 정치적 언사인지 여부는 더 확인해봐야겠지만 일단 심적 연대가 되는 이유는 무엇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