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파생상품시장 불모지, 개설 2년 만에 세계 1위로= 1990년대 초 우리나라는 파생상품의 황무지였다. 주가가 오르면 돈을 벌었고 주가가 내려가면 돈을 잃는 것이 전부였다. 심지어 펀드매니저들도 극소수를 제외하면 선물이니 옵션이니 하는 용어 자체를 몰랐다. ‘선물(先物·Futures)’을 ‘선물(膳物·Gift)’로 오인하는 펀드매니저가 많았다는 웃지 못할 이야기도 전해진다.
1993년 취임한 홍 전 이사장은 취임 후 첫 업무보고를 받는 자리에서 단숨에 파생상품시장의 중요성을 인식했다. 재무부 증권보험국장과 민간 증권사 사장을 두루 역임한 내공이 빛났다. 하지만 다수 증권사는 여전히 관심이 없었다. 그는 업계를 설득하는 데 시간을 허비하는 대신 당장 할 수 있는 일부터 찾았다. 우선 거래소 내부의 ‘파생상품개발과’를 ‘파생상품개발부’로 승격시켰고, 친분이 있는 증권사 사장 5명을 모아 ‘선물시장 개설 추진위원회’를 만들었다.
존재하지 않던 시장을 만들어 내는 일은 간단치 않았다. 홍 전 이사장은 증권거래소 관련 법률에 파생상품시장 개설권한을 포함시키기 위해 거의 매일 새벽 국회의원을 찾았다. 주가가 떨어질 때를 대비해야 한다는 점을 강조하며 관련 시장 개설의 필요성을 역설했다. 고군분투 끝에 1994년 증권거래법에 거래소가 주가지수선물시장을 개설할 수 있는 권한이 명시됐다. 이후 실무작업을 거친 뒤 선물시장은 1996년, 옵션시장은 1997년 만들어졌다.
새로 개설한 시장이 금세 자리를 잡게 된 계기는 직후 터진 외환위기였다. 주가가 폭락하자 증권사들이 위험관리의 중요성을 스스로 인식하게 되면서다. 1997년 하루평균 32건에 불과했던 코스피200옵션 거래량은 이듬해인 1998년 111건으로 늘더니 1999년 321건, 2001년 3347건, 2003년 1만1489건 등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했다. 이후 2000년대 한국이 세계 파생상품시장 1위를 유지할 수 있던 것은 홍 전 이사장 재임기간 기초토대를 잘 닦아뒀기 때문이라는 게 시장 관계자들의 중론이다.
김원대 거래소 부이사장은 “현재는 거래소와 증권업계 모두 파생상품으로 수익의 많은 부분을 내고 있고, 한 때는 파생으로 많은 돈을 벌었다”면서 “한국 자본시장의 외연을 넓힌 동시에, 시장 발전에 필연적인 과정을 꼼꼼하게 이뤄낸 점이 홍인기 전 이사장의 업적”이라고 말했다.
◇ 국제증권거래소 연맹총회 개최…주식시장 국제화 첫 단추= 홍 전 이사장의 재임기는 김영삼 정부와 김대중 정부에 걸쳐 있다. 역대 이사장 가운데 정권이 교체된 이후에도 이사장직을 유지한 것은 홍 전 이사장이 유일하다. 전임 정권에서 임명한 인사를 그대로 뒀다는 것은 그만큼 홍 전 이사장의 능력을 인정했다는 얘기다.
홍 전 이사장은 현재까지도 거래소 직원들에게 많이 회자된다. 그와 관련해 주로 언급되는 이야기는 ‘불 같은 추진력’이다. 다르게 말하면 급한 성격 탓에 주위 사람들을 피곤하게 하는 상사’라는 얘기다. 홍 전 사장은 방향이 정해지면 바로 실행에 옮기는 업무스타일이었다. 일례로 오후에 갑자기 증권사 사장단 회의 소집을 결정하는 날이면 실무직원들은 부서 전체가 그날 밤을 꼬박 새워서 회의 자료를 만들어야 했다. 이에 몇몇 직원들은 그의 등쌀에 가중된 업무를 견디지 못해 줄줄이 회사를 떠나기도 했다.
하지만 다수의 거래소 관계자들은 홍 전 이사장이 거래소 위상을 높이는 데 큰 기여를 했다고 평가한다. 홍 전 이사장 재임 당시 파생상품개발부 실무자였던 김도연 거래소 파생상품시장본부 상무는 “’독불장군’ 스타일이라는 부정적인 여론도 있었지만 아마 그렇게 하지 않았으면 3개월 걸릴 일이 3년 이상 걸렸을 것”이라며 “거래소나 자본시장에 정말 큰 공적을 세우신 분이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증권업계 인사 가운데도 홍 전 이사장 재임기간에 국내 상장주식 시가총액이 사상 처음 100조원을 돌파하는 등 업계 전체가 전반적으로 단합·고무된 시기였다고 기억하는 이가 많다. 국제증권거래소연맹총회 개최(1994년 10월11일), 유가증권 국제표준코드 부여(1995년 3월17일) 등을 추진해 국내 주식시장의 국제화를 열었다는 점도 홍 전 이사장의 업적으로 평가받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