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일본의 한 미디어 관계자와 이보미(27ㆍ혼마골프)에 대한 이야기를 나눴다. 이 관계자는 기자와 10년 지기지만 최근 수년 사이엔 만난 일이 없다. 반가운 마음에 서로에 대한 안부를 물었다. 하지만 곧 화두는 이보미 쪽으로 흘렀다.
“이보미, 대단해!” 그가 먼저 이보미 이야기를 꺼냈다. 그리고는 “이보미, 정말 예쁘다. 골프도 잘 치고…”라며 끝나지 않을 것 같은 이보미 칭찬을 늘어놓았다.
그러고 보면 일본에서의 이보미 신드롬은 분명 예삿일은 아니었던 것 같다. 참으로 궁금한 일이다. 자국민도 아닌 외국인 선수에게 이토록 호의적일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일까. 거기엔 일본 골프팬들의 미묘한 감정이 교차하고 있었다.
“솔직히 화가 난다.” 그가 다시 입을 열었다. “오해는 하지 마라. 이보미 때문이 아니다.” 그는 이보미에 얽힌 일본인들의 복잡한 심경을 털어놓았다. “일본 골프는 망했다.” 그의 복잡한 심경은 다소 극단적인 표현으로 이어졌다. 스타 부재 일본 프로골프 투어를 겨냥한 말이었다.
올 시즌 일본여자프로골프(JLPGA) 투어 37개 대회 중 22개 대회에서 외국인 선수가 우승컵을 가져갔으니 그의 극단적 발언도 결코 억지는 아닌 듯하다.
상금순위도 1위부터 5위까지 외국인 선수들이 점령했다. 6위 와타나베 아야카는 34개 대회에 출전했지만 간신히 1억엔(약 9억6000만원)을 넘긴 유일한 일본 선수다.
상금순위 2위 테레사 루(대만)와 4위 안선주(28)는 26개 대회밖에 출전하지 않았지만 각각 1억4695만엔(약 14억2000만원)과 1억520만엔(약 10억1000만원)을 벌어들였다.
JLPGA 투어 비회원인 전인지(21ㆍ하이트진로)는 3개 메이저 대회에 출전해 2개 대회에서 우승하며 상금 5468만엔(약 5억2000만원)을 벌어갔다. 고작 3개 대회를 뛰었지만 상금순위 16위에 해당하는 금액이다.
외국인 선수 상위 5명의 상금을 모두 합하면 약 7억엔(약 67억원)으로 올 시즌 JLPGA 투어 상금 총액 33억8000만엔(약 326억원)의 약 21%를 차지했다. 최근 6년 사이 상금순위에서도 일본인 상금왕은 2013년 모리타 리카코가 유일하다.
이만하면 JLPGA 투어에 대한 비난과 질타가 쏟아지지 않는 것이 더 이상한 일이다. 비슷한 예로 국내 프로농구(KBL)의 인기 하락 요인은 ‘토종’ 선수들의 성적 부진, 스타 부재와 무관하지 않다. 그것은 리그의 운명과도 직결되는 중대한 문제다.
하지만 JLPGA 투어를 둘러싼 비판이나 질타는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가 없다. 2000년대 초반 JLPGA 투어를 설레게 했던 두 스타 미야자토 아이와 요코미네 사쿠라가 미국여자프로골프(LPGA) 투어에 진출하면서 JLPGA 투어에 대한 인기는 시들해졌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스타가 없다”, “유망주가 없다”라는 말이 끊임없이 이어지고 있다. JLPGA 투어엔 더 이상 이보미의 대항마는 없다. 어찌 보면 JLPGA 투어는 절체절명의 위기를 맞았다.
그러나 JLPGA 투어의 ‘스타 부재’ 공백을 메운 건 이보미였다. 수려한 외모에 걸출한 실력, 사랑스러운 골프 매너, 그리고 일본 친화적 발언 등이 일본 팬들의 마음을 움직였다. 매 대회마다 이보미를 보기 위해 대회장을 찾는 일본 팬들은 소리 높여 이보미를 연호한다. 외국인 선수 우승 보도에 인색했던 일본 언론도 이보미 친화적인 기사로 돌아섰다.
안선주는 2010년 한국인 첫 상금왕에 오른 후 일본의 극우단체와 야쿠자들로부터 “일본을 떠나라”라는 협박에 시달렸던 경험이 있다. 만약 이보미가 2000년대 중후반 미야자토 아이와 요코미네 사쿠라가 양강 구도를 형성했던 시기에 JLPGA 투어에 데뷔했다면 어땠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