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가 시위로 얼룩졌던 1991년 연말 한해를 결산하는 기사를 취재하기 위해 연세대 교정에 들어서던 순간, 한 학생이 “아버지, 빨리 오세요”라고 외쳤다. 지방에 사는 아버지에게 학교구경을 시켜주고 있었다. 아버지는 신기한 듯 학교 건물을 둘러보다 대학 다니는 아들이 자랑스러운 듯 머리를 쓰다듬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아버지”라는 단어를 들으며 한참 동안 발걸음을 떼지 못했다. 아버지가 빨리 돌아가셔서 “아버지”라는 단어를 너무 오랫동안 잊고 살았고 바쁘다는 이유로 아버지 생각조차 못 했던 나에게 그 학생이 외친 “아버지” 는 가슴에 화인(火印)이 됐다.
가슴 한쪽에 넣어 두었던 1991년 연말 풍경을 소환시킨 것은 1000만 명을 울렸다는 한편의 광고다.‘어쩌면 당연해서 잊고 지내는 이름, 늘 그 자리에 있기에 무심했던 이름, 사랑합니다로는 다 채울 수 없는 이름, 같이 있는 것만으로도 든든함이 하늘같은 그 이름’이라는 광고 카피가 눈길을 사로잡은 KB금융의 바이럴 광고다. 40개월 미만 어린 자녀를 둔 젊은 아빠들이 “부모로서 이렇게 뭔가 충분히 해줘야 하는데 그런 것도 못 해줘서 마음이 아픕니다” “계속 부족한 것이 부모 마음 아닐까요. 죽는 순간까지 제가 그런 마음으로 살고 있어요”“미안하다. 모든 것이 부족하고 못 가르치고…” 라는 아버지의 마음과 육성이 담긴 영상을 보며 눈물 흘릴 때 그 영상을 보는 사람들도 함께 울었다. 잊고 지냈던 아버지를 떠올리게 한다. 그리고 2015년 대한민국 아버지들의 눈물을 보게 한다.
요즘 청년들은 취업난 등으로 연애와 결혼, 출산을 미루는 3포 세대, 인간관계를 단절하고 내 집 마련을 생각조차 안 하는 5포 세대, 희망과 꿈마저 포기하는 7포 세대 등 포기의 숫자를 늘려가며 절망한다. 수많은 젊은이가 피나는 노력과 빼어난 실력이 금수저 물고 나온 사람 앞에선 설 자리를 잃는 불공정한 금수저 신화 앞에 좌절한다.
그런데 아버지들은 더 절망하고 더 좌절한다. 더 아프다. 자식들이 고단한 현실에 눈물을 흘릴 때 아버지는 피눈물을 쏟는다. 자신이 권력과 재력을 갖추지 못해 자식이 고생하는 것 같아서. 자식들에게 금수저를 물려주지 못하고 좋은 스펙이 되어주지 못해 미안해서.
‘…세상이 시끄러우면/ 줄에 앉은 참새의 마음으로/ 아버지는 어린 것들의 앞날을 생각 한다/ 어린 것들은 아버지의 나라다-아버지의 동포(同胞)다/ 아버지의 눈에는 눈물이 보이지 않으나/ 아버지가 마시는 술에는 항상 보이지 않는 눈물이 절반이다…’ 김현승 시인의 시 ‘아버지의 마음’이 이 땅의 아버지 마음일 것이다.
구조조정의 칼바람을 온몸으로 맞고 사는 직장인 아버지에서부터 대기업의 위력 앞에 힘겨워하는 자영업 하는 아버지, 땀과 고생 값도 나오지 않는 농산물로 어려움을 겪는 농사짓는 아버지까지 이땅의 아버지들은 자식을 위해 안간힘을 다해 버틴다. 하지만 하나둘씩 포기하며 살아가는 자식들을 보며 무너진다. 그래서 아버지가 마시는 술의 절반은 눈물이다.
우리 사회와 정부, 정치권은 정책과 제도, 노력 등으로 젊은이들의 포기 숫자의 행렬을 멈춰야 한다. 금수저의 불공정한 신화를 깨뜨려야 한다. 이 땅의 수많은 아버지가 더 이상 눈물 흘리지 않게. 그리고 자식들은 아버지에게 사랑한다는 말도 하고 자는 모습도 지켜보자. 수첩 한쪽에 아버지 사진 한 장 넣어두자. 아버지가 더 많이 웃음 짓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