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끔은 쇼핑도 한다. 내 스마트폰의 바탕화면에는 국내 대기업이 운영하는 종합 쇼핑사이트에서부터 해외직구사이트, 오픈마켓, 소셜커머스까지 추리고 추렸는데도 쇼핑 애플리케이션만 스무 개가 넘는다. 반드시 필요한 물건이 있는 것도 아닌데 무심결에 훑어보다 보면 싼 맛에 충동적으로 결제 버튼을 누르는 경우가 다반사다. 예전 같으면 일일이 발품을 팔아 실물을 확인하고 합리적이다 싶으면 지갑을 열었지만 이젠 앉은 자리에서 화면만 몇 번 꾹꾹 눌러줘도 희열을 느낀다. 쇼핑의 즐거움을 느끼는 방법이 달라지고 있는 것이다.
얼마 전 ‘블랙 프라이데이(이하 블프)’의 원조 미국에서 일어난 블프와 사이버 먼데이의 매출 성장률 역전 현상도 이런 행동 패턴의 변화 때문일 거다.
매년 이맘때면 미국에선 쇼핑대란이 일어났었다. 유통업계가 추수감사절부터 시작되는 연말 쇼핑시즌을 겨냥해 창고에 쌓인 재고를 소진하느라 땡처리 세일을 진행하는데, 그 할인폭이 어머어마하다 보니 도로는 극심한 교통 정체에, 할인 매장들은 몰려드는 쇼핑객들로 북새통이었다.
그러던 것이 올해는 상황이 달라졌다. 매장은 한산한 대신 온라인몰 접속이 폭주하면서 사이트가 마비되는 업체가 속출했다. 이는 수치로도 나타났다. 추수감사절 연휴 이틀간 미국 100대 유통업체의 온라인 매출은 총 44억7000만 달러로 전년보다 18% 늘어난 반면 오프라인 매출액은 121억 달러로 작년보다 1.5% 줄었다. 뿐만 아니라 추수감사절 후 첫 월요일인 사이버 먼데이 매출액은 30억 달러로 역대 최고 기록을 세웠다.
과거에는 추수감사절 연휴가 끝나고 월요일 직장에 출근한 소비자들이 회사의 초고속 인터넷 회선을 이용해 쇼핑을 하면서 추수감사절 후 첫 월요일은 온라인 판매가 최고조에 이르는 것이 통상적이었다. 그러나 이것도 옛말. 지금은 누구나 스마트폰을 갖고 있고, 가정에서도 초고속 인터넷이 가능해 소비자들은 언제 어디서든 온라인 쇼핑을 할 수 있다.
이 때문에 미국 유통업체들도 올해는 채비를 단단히 했다. 블프 마케팅은 한여름 무더위가 가시기 전부터 시작됐고, 특히 오프라인보다는 온라인 판촉에 주력했다. 중국 전자상거래 업체인 알리바바그룹은 지난달 11일 ‘광군제’ 하루에 912억 위안이라는 사상 유래없는 매출 실적을 달성하기도 했다.
이런 실상과 동떨어진 ‘코리아 블랙프라이데이’, ‘K-세일데이’ 같은 우리 정부 주도의 내수 진작책에 한숨이 나온다.
10월 국내 소매 판매는 코리아 블프 효과에 힘입어 57개월 만의 최대폭을 기록했다고 한다. 다행이다. 수출과 투자 부진을 소비로 만회하겠다는 정부의 전략이 어느 정도 맞아떨어졌으니 말이다. 하지만 블프 효과는 경제 전반에 활력을 주지는 못했다. 10월 산업생산은 수출 부진으로 다섯 달 만에 뒷걸음질치고, 설비투자도 감소세로 돌아섰다.
태생부터 다른 미국 블프를 한국에 들여온 발상 자체가 어불성설은 아니었을까. 미국의 블프는 단순한 폭탄 세일이 아니다. 미국은 땅덩이 자체가 넓다. 이 때문에 대형 유통업체들은 손실을 최소화하려고 공산품은 1년치를 한꺼번에 받는다고 한다. 그러다가 새해 입고 제품 목록이 정해지면 현 재고를 소진해야 하는데, 다른 매장으로 보내자니 거리상 배송비와 인건비 부담이 크다. 그래서 배송비 부담을 소비자에게 지우는 대신 할인 혜택을 크게 줘 적자를 면하자고 만든 게 블프였다.
반면 우리나라는 미국처럼 영토가 넓지 않아 매장 간 교류가 활발하고 덕분에 재고 소진도 수월하다. 1년치 재고를 한꺼번에 받아둘 이유가 없기 때문에 블프 같은 대대적인 할인 행사에 내놓을 만큼 묵은 물건도 없고, 그러다 보니 할인율에도 한계가 있다. 코리아 블프 당시, 소비자 입장에선 ‘먹을 것 없는 잔치’, 참여 업체엔 ‘울며 겨자먹기’라는 볼멘소리가 나온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올해 같은 추세라면 앞으로 미국에서 블프는 사이버 먼데이로 대체될 것 같다. 우리 정부의 야심 찬 내수 진작책이 1회성 이벤트로 끝날 수도 있다는 이야기다. 대세에 따르는 건 바람직하나 국내 실정을 더 감안했어야 하는 건 아니었는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