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철순 칼럼] 대통령이 남길 것은 기록과 품위

입력 2015-11-24 10: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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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필 겸 미래설계연구원장

“영광의 시간은 짧았지만 고통과 고뇌의 시간은 길었습니다.” 김영삼 전 대통령이 퇴임사에서 비통하게 한 말이다. 1993년 취임 초기에 절대적인 인기와 지지를 받았던 대통령이 비난과 조롱의 대상이 되어 물러났으니 고통과 고뇌가 컸을 것이다.

그러면 다른 전직 대통령들은 고통과 고뇌 없이 행복하거나 행복했던가? 우리에게는 왜 행복한 전직 대통령이 없는 것일까? 그들이 불행한 것은 기본적으로 집권과정의 정통성에 문제가 있거나 재임 중의 일처리가 공정하지 못하고 비도덕적이었기 때문이다. 친인척 등 주변 인물들을 제대로 단속하지 못한 잘못도 있다.

하지만 더 중요한 점은 스스로 발전하려고 더 이상 노력하지 않는 것이다. 정치인은 권력의 정상인 대통령이 되는 것으로 삶이 완성되지 않는다. 대통령의 임기는 짧고 유한하다. 그 뒤 죽을 때까지의 삶은 스스로 애써야 제대로 일구어갈 수 있는, 더 길고 어려운 시간이다. 그런데 우리의 대통령들은 대통령이라는 자리에서 삶이 멎어 버렸다.

고정된 사고와 행동으로는 그 이후의 삶에 적응하기 어렵다. 더욱이 행복은 누가 가져다주는 게 아니다. 국가원수였던 사람은 자신의 행복이 곧 국민과 사회의 행복이라는 점을 인식해야 한다. ‘최고 결정자’에서 벗어난 위상에 맞게 새로운 기여와 봉사를 기획하지 않으면 안 된다.

며칠 전부터 미국의 제33대 대통령 트루먼(1884~1972)의 전기를 읽고 있다가 김영삼 전 대통령의 서거 소식을 접했다. 자연히 대통령의 리더십과 바람직한 삶에 대해 생각하게 됐다. ‘트루먼, 진실한 대통령 진정한 리더십’(정숭호 지음, 인간사랑)은 ‘마이너리티로는 노무현 이상, 원칙주의로는 박근혜 이상이었으나 소통에서는 두 사람 모두를 뛰어넘은 지도자’에 관한 책이다.

평범한 시골 농부가 생각지도 않게 대통령이 되어 원자탄 투하, 한국전 참전 등 중요한 결단을 통해 역사를 이끌어가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인기 없던 대통령이 퇴임 후 뛰어난 지도자로 재평가 받게 된 배경도 이해할 수 있었다.

대통령이 남길 것은 기록과 품위다. 대통령직을 수행한 사람은 재임기간의 일에 대해 냉정하고 정직한 기록부터 남겨야 한다. 왜 그 상황에서 그런 판단을 했는지 알게 해주는 객관적 자료를 보전해야 한다. 트루먼의 회고록은 자랑도 없고 재미도 없다고 한다. Story(이야기)가 아니라 History(역사)가 돼야 한다는 생각에서 문체나 책의 구성보다 사실 확인에 주력하는 바람에 집필 기간도 아주 길었다. 그는 이미 1950년대에 의회를 설득해 모든 대통령의 문서를 마이크로필름으로 보관토록 했던 사람이다.

김영삼 전 대통령의 경우 회고록이 나온 게 벌써 15년 전이다. 세 권으로 된 회고록은 국회 발언록과 썼던 글 외에 자기 변호에 치우치기 쉬운 민주화 투쟁과 회고 위주로 돼 있다. 그 이후의 삶은 제대로 기록된 게 없다.

퇴임한 지 불과 2년 만에 올해 회고록을 낸 이명박 전 대통령의 경우는 회고록 출판으로 오히려 논란과 갈등을 빚었다. 자기 시대의 역사를 정확하게 기록해 후세에 남긴다는 자세로 쓴 회고록으로 볼 수 없다.

트루먼은 별로 경제적 여유가 없었는데도 퇴임 후 이름을 팔아 생활하지 않았다. 그는 은퇴한 대통령이 품위 있게 사는 법을 보여주었고, 그런 삶을 영위함으로써 미국인들은 그를 재평가하는 데 주저하지 않게 됐다.

내년 총선을 앞두고 이제 정치인들의 온갖 전기와 에세이가 마구 쏟아질 것이다. 전직 대통령은 물론 정치를 하려는 사람들은 기록과 품위가 얼마나 중요한지 알아야 한다.

김영삼 전 대통령의 서거로 생존하는 전직 대통령은 전두환 노태우 이명박 세 사람으로 줄어들었다. 이들로부터 냉정한 기록과 넉넉한 품위를 기대할 수 있을까? 기대하기 어려워 보인다. 대통령에게는 리더십과 결단이 중요하지만, 퇴임 후에 바람직한 삶을 펼치지 못하면 훌륭한 업적과 의미 있는 결단도 빛이 바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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