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보다 더 오래전에는 초등학교 5학년 된 아이의 손을 잡고 대관령 꼭대기에서부터 강릉 시골 할아버지 집까지 옛길을 따라 걸어갔던 적이 있었다. 지금 대관령의 그 길은 새로 뻥 뚫렸다.
예전에 아이와 내가 걸어갔던 길은 저 옛날 신사임당이 어린 율곡의 손을 잡고 걷고, 율곡의 친구 송강 정철이 강원도 관찰사로 부임해 이 길을 걸어 영동지역의 여러 마을을 둘러보고 관동별곡을 썼으며, 단원 김홍도가 이 길을 넘다가 경치에 반해 그 자리에서 화구를 펼쳐놓고 ‘대관령도’를 그린 아흔아홉 굽이의 옛 고갯길이다.
그때 아이와 함께 하루 종일 걸으며 주고받은 얘기를 바탕으로 ‘아빠만 있고 아버지가 없는 시대’에 ‘아들과 함께 걸은 길’이라는 책을 펴냈다. 그 책이 지금은 초등학교 교과서에도 실려 있고, 또 어느 부분은 중학교와 고등학교 교과서에도 실려 있다. 어떻게 그럴 수 있나 봤더니 똑같은 내용인데 학교 따라 시험문제만 다르다.
지금은 서른 살이 훌쩍 넘은 아들이 그때의 여행을 어떻게 기억하고 있는지는 모르겠다. 자라면서 방학 때마다 늘 여행을 떠나고, 직장을 다니면서도 틈틈이 여행을 다닌다. 그때나 지금이나 여행을 떠나는 젊은이들에게 내가 늘 강조하는 말은 “나무만 보지 말고 숲을 보라”가 아니라 “제발 큰 덩어리로 숲만 보고 오지 말고 나무를 좀 보고 오라”는 것이다.
흔히 우리는 일상생활에서, 또 여행에서 입버릇처럼 말한다. 나무만 보지 말고 숲을 보라. 아마 그것은 작은 것만 보지 말고 큰 것을 보라는 뜻과, 또 부분만 보지 말고 전체를 보라는 뜻일 것이다. 그러나 여행에서는 그 반대여야 한다. 대개의 사람들은 여행을 떠나면 나무는 보지 않고 숲만 보고 돌아온다.
경주로 떠나든 설악산으로 떠나든 단지 그곳에 갔었다는 것과 머물다 왔다는 것에만 의미를 두지 그 도시와 들과 산에 널려 있는 유적들과 자연의 표정들은 제대로 살펴보지 않고 돌아온다. 그리고 마치 거기에 갔었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사진만 열심히 찍고 돌아온다.
어떤 것도 아는 것만큼 보인다. 책도 아는 것만큼 내용을 읽게 되고, 여행 중에 만나는 세상 풍경과 유적답사 역시 그렇다. 나무를 모르면 전체 숲을 보지 못하고, 역사를 모르면 유적을 볼 수 없고, 인문지리를 모르면 세상 풍경을 읽을 수 없다.
아이들의 방학 시즌이다. 많은 청춘들이 이미 해외로 또 국내 곳곳으로 여행을 떠났고, 떠날 준비를 하고 있다. 아이들을 떠나보내는 부모들도 아이들이 챙겨가는 가방 속의 내용에만 신경 쓰지 전체 여행을 위한 보다 큰 준비엔 신경 쓰지 않는다. 당연히 그렇다. 본인도 아이가 무얼 챙겨야 하는지 모르기 때문이다.
그건 올바른 여행이 아니다. 여행은 세상의 숲을 보러 떠나는 것 같지만 실제로는 그 숲을 이루는 나무를 보러 떠나는 길이다. 나무를 봄으로써 전체 숲을 보는 지혜를 배우는 것이 길 위에서 배우는 우리 삶의 또 다른 공부인 것이다.
1958년 강릉 출생. 1988년 단편 ‘낮달’(계간 문학사상)로 등단.
현대문학상 동인문학상 한무숙문학상 효석문학상 등 수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