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1년 6월 방송·연예계와 IT벤처기업계의 시선이 한 곳으로 쏠렸다. IT벤처 사업가 출신의 이재웅 다음커뮤니케이션 창업자와 KBS 9시 뉴스 앵커를 지낸 황현정 KBS 아나운서의 결혼이었다. 당시 그가 주목받은 이유는 KBS 간판 아나운서와 결혼 때문은 아니었다. 이 창업자 역시 IT벤처업계에서 실력있는 경영인으로 주목받고 있던 시점이었다. 2008년 다음을 떠나고 2014년 10월 카카오와 합병으로 이 창업자의 존재감이 예전만 못한 것은 사실이다. 그럼에도 그가 벤처 1세대로 대한민국 인터넷산업에 뚜렷한 족적을 남긴 것은 엄연한 진실이다.
이 창업자는 고 이철형 전 한국종합건설 대표의 1남 2녀 중 장남으로 서울에서 태어나 자랐다. 어려서부터 컴퓨터 형식으로 된 공학계산기를 써보면서 성장했다. 공학을 전공한 아버지 덕분이었다. 고등학교 1학년 때에는 애플(Apple)II를 모방한 ‘청계천표’ 클론(애플 복제품)을 갖게 되면서 인생의 방향과 좌표를 그리게 된다. 1980년대 국내에 처음 보급된 ‘애플컴퓨터’를 흉내 낸 애플복제품은 서울 청계천 세운상가에서 구매가 가능했다. 이 창업자가 당시 처음 접한 컴퓨터는 훗날 다음커뮤케이션 창업의 원동력 역할을 하게 된다.
넥슨컴퓨터박물관의‘내 인생의 컴퓨터’에 밝힌 이 창업자는 컴퓨터를 바깥 세상과 같이 얘기하는 커뮤니케이터로 평가했다. 이 창업자는 “사람들이 전화로 얘기를 하는 것처럼 컴퓨터를 통해 바깥 세상과 같이 얘기 할 수 있는 도구가 컴퓨터였다”며 “처음에는 게임을 많이 했고, 베이직 프로그래밍을 배우면서 재미를 느끼게 돼 컴퓨터 과학을 전공하는 계기가 됐다”고 회고했다. 이 창업자는 연세대에서 전산과학과 학사와 석사학위를 받았다. 당시에는 연세대 공대에 컴퓨터공학과가 없었다. 대신 전산과학과로 불리웠다. 이 창업자는 1993년 프랑스로 유학길에 오른다. 프랑스 파리 제6대학에서 인지과학(인간 두뇌의 원리를 밝히는 학문)을 공부하기 위한 길이었다. 이곳에서 이 창업자는 지금은 고인이 된 박건희 사진작가와 만난다. 당시 영동고등학교 동창생으로 유학생 신분이었던 이 창업자와 박 작가는 자주 만나면서 막역한 사이로 발전했다. 이후 두 사람은 귀국한 뒤 이 창업자의 연세대 4년 후배인 이택경씨 등과 의기투합해 1995년 서울 청담동에 다음커뮤니케이션을 설립했다. 자본금 5000만원에 20평 남짓한 사무실, 책상 3개가 다음의 시작이었다.
다음 초기의 자금사정은 넉넉하지 않았다. 다음의 사업자체가 부진한 것은 아니었다. 다만 광고 수익 모델이 당장 현금화가 어려워지면서 서버 비용을 감당하기가 어려웠다. 이 때문에 SI용역개발을 부업으로 삼으며 회사를 지탱했다.
이 창업자는 1997년 국내 최초의 무료 웹메일인 ‘한메일(hanmail)’ 서비스를 내놓는다. 한메일은 서비스 오픈 3년만에 국내 단일 사이트로는 처음으로 1억 페이지뷰를 돌파하며 폭발적인 반응을 보였다. 한메일은 뒤에 ‘다음메일’로 바꿔 통합관리된다. 2년 뒤인 1999년에는 온라인 카페 서비스인 ‘다음카페’가 공개되며, 다음의 브랜드를 널리 알리는 계기가 된다. 한메일과 다음카페의 성공을 등에 업은 다음은 1999년 11월 코스닥시장에 상장하게 된다. 코스닥시장에 처음 거래된 다음은 공모 후 하루도 빼놓지 않고 25일 연속 상한가라는 진기록을 세우기도 했다.
이후에도 이 창업자는 혁신적인 아이디어로 새로운 영역에 도전장을 내민다. 2000년 3월 온라인 쇼핑몰인 ‘다음쇼핑(현 디앤샵)’을 출시했고 같은 해 7월에는 재테크 정보를 제공하는 ‘다음 금융플라자’를 오픈한다. 이 중 다음쇼핑은 2007년 GS홈쇼핑에 매각됐다.
2002년에는 미디어 태스크포스(TF)팀을 미디어본부로 확대 개편하고 ‘미디어 다음’의 기반을 구축한다. 이어 온라인 자동차보험인 ‘다음다이렉트자동차보험’을 설립하며 외형 확대에 나선다. 2004년에는 미국 인터넷 포털 라이코스를 인수·합병하면서 해외시장 진출에도 눈을 돌린다. 하지만 이 창업자는 값비싼 학습비용을 치르게 된다. 라이코스의 부실이 심각해지면서 다음은 2010년 미국 IT 서비스업체인 와이브랜트에 라이코스를 매각하는 결정을 내린다. 2008년 7월 이 창업자는 10년 넘게 지키던 회사를 떠났다. 당시 이 창업자는 평사원 신분도 버리고 다음 지분 18.34%를 가진 대주주 신분만 유지했다. 이듬해인 2009년에 이 창업자는 에스오피오오엔지(sopoong) 설립하며 소셜벤처(사회적 벤처) 인큐베이팅 사업을 전개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