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성물산, 제일모직 합병의 표면적인 이유는 양사의 강점을 합쳐 패션, 식음, 건설, 레저, 상사, 바이오 등 인류의 삶 전반에 걸쳐 시너지를 내겠다는 것이다.
재계는 그러나 이번 합병에 숨은 두 가지 뜻을 주목하고 있다. 첫째는 최근 삼성중공업과 삼성엔지니어링의 합병 실패로 유일하게 실패한 건설 부문의 사업재편이다.
삼성그룹은 2013년 하반기부터 계열사끼리 쪼개고, 떼고, 붙이며, 숨 가쁘게 사업구조를 뜯어고쳤다. 이로써 복잡하게 얽혀 있던 삼성그룹의 순환출자 고리는 제일모직을 정점으로 ‘삼성생명→삼성전자→삼성물산·삼성전기·삼성SDI→제일모직’으로 단순화했다.
삼성그룹은 지난해 9월까지 1년 새 8번이나 그룹 내 사업을 재편했다. 2013년 9월 당시 제일모직은 패션사업을 떼어 내 삼성에버랜드(현 제일모직)에 넘겨줬다. 같은 달 삼성SDS는 삼성SNS를 흡수합병했다. 10월에는 삼성디스플레이가 코닝에 삼성코닝정밀소재 지분을 매각했다. 11월엔 삼성에버랜드가 급식·식자재 사업을 ‘삼성웰스토리’로 물적 분할하고 건물관리사업을 에스원에 넘겼다.
지난해 6월엔 삼성종합화학과 삼성석유화학을 합쳤고, 7월엔 제일모직 소재부문과 삼성SDI 통합법인이 출범했다. 같은 해 9월 삼성중공업과 삼성엔지니어링의 연내 합병을 결정했지만 주주들의 반대에 부딪혀 무산됐다. 11월에는 방산·화학 부문 4개 계열사를 한화그룹에 매각하는 빅딜을 발표했다.
애초 삼성그룹은 삼성중공업과 삼성엔지니어링 합병을 시작으로 건설 부문의 사업구조를 재정비할 계획이었다. 삼성물산, 제일모직의 건설 사업을 한 데 모아 경쟁력을 갖추겠다는 전략이 깔려있었다.
재계에서도 이들 4개 계열사의 규모가 크고, 지배구조가 복잡한 만큼 삼성그룹이 건설 부문 정리를 위해 어떻게든 삼성중공업과 삼성엔지니어링 합병을 가장 먼저 진행할 것으로 관측했다.
그러나 이번 삼성물산, 제일모직 합병으로 이러한 예상은 완전히 빗나갔다. 삼성그룹은 삼성중공업, 삼성엔지니어링 합병에 다소 시일이 걸릴 것으로 판단, 건설 부문 사업재편의 몸통을 합치는 가장 빠른 정공법을 선택한 것으로 보인다.
무엇보다 삼성물산, 제일모직의 합병은 최근 시작된 삼성그룹 승계와 맞닿아 있다. 삼성물산은 삼성전자 지분 4.1%를 보유한 2대주주다. 이번 합병으로 제일모직의 최대주주(22.24%)인 이재용 부회장은 그룹의 핵심인 삼성전자에 대한 지배력을 높일 수 있다.
재계 고위 관계자는 “삼성물산, 제일모직의 합병은 삼성그룹 지배구조의 지각변동이라고 할 만큼 대형사건”이라며 “향후 이 부회장이 보유한 삼성SDS, 제일모직 지분 변동 여부도 큰 관심사”라고 말했다.
한편 삼성물산, 제일모직은 오는 7월 임시주주총회를 거쳐 9월 1일자로 합병을 마무리 할 계획이다. 제일모직이 기준주가에 따라 산출된 합병비율인 1대 0.35로 삼성물산을 합병하는 방식이다. 합병 이후의 사명은 삼성물산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