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주 예비군 사격장에서 총을 난사하고 자살한 사람은 미리 써 놓은 유서에서 “영원히 잠들고 싶다. 사람들을 다 죽여 버리고 나도 죽어 버렸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강박증으로 되어 간다”고 썼다. 그는 “무슨 목적으로 사는지 모르겠고 그냥 살아 있으니깐 살아가는 것 같다”는 말도 했다. 그 예비군처럼 그냥 살아 있으니 살아가는 사람들이 많아 보인다.
울분과 냉소는 좌절과 배신감, 괴리감이 쌓이고 겹쳐져 형성되는 게 아닐까. 나름대로 노력했지만 이루어지는 게 없고 적응하기 힘든데, 부정과 비리로 잘 먹고 잘사는 사람들은 많으니 이 울분과 좌절감을 어찌할까.
건강한 사회, 성숙한 사회는 게임의 룰 적용이 철저해 노력한 만큼 평가받고 보상을 얻을 수 있는 사회다. 그런데 경쟁 자체가 불공정하다. 타고난 신분과 계층의 괴리가 더욱 강고해지면서 경쟁의 기회마저 주어지지 않는다. 그러면 그냥 시들어 버리거나 경쟁 자체를 부정하고 ‘잘못된 틀’을 깨기 위해 나서야 한다. 그게 합리적이고 건전한 행동이라면 탓할 게 없지만, 대부분의 경우 자신과 사회를 부정하는 파괴적 행동으로 연결되기 쉽다.
울분과 냉소를 해소하려면 우선 각 개인이 정당한 경쟁을 통해 성공이나 행복을 얻을 수 있게 보장해 주어야 한다. ‘노력하니 되더라’ 하는 신뢰 경험이 폭넓게 축적돼야 한다. 국가와 사회는 공정한 경쟁의 룰이 적용되도록 최대한 노력하고 감시해야 한다. 목표를 성취하지 못했다 해도 그 과정과 노력도 중시해 평가하고 표창해 주어야 마땅하다. 초등학교에서부터 상벌을 명확히 하되 과정에 대한 평가를 공정하게 해야 한다.
이런 것들은 어쩌면 하나마나 한 소리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되풀이해서 강조할 수밖에 없다. 울분과 냉소는 하루아침에 형성된 게 아니니 그 해소 노력과 대처도 장기적일 수밖에 없다.
더 중요한 것은 본보기를 사회 곳곳에 세우는 것이다. ‘아름다운 공인’이 부문별로 많아야 한다. 예비군 사격장에서 그 사건이 났을 때 책임 있는 지휘관이나 조교들은 다 달아나기 바빴다. 사건은 그가 총질을 하고 목숨을 끊음으로써 저절로 마무리됐다. 앞에 나가서 그를 막다가 죽으라는 말이 아니다. 중요한 것은 그런 사고에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지 몸에 배어 있어야 한다는 것, 준비된 대로 실행할 수 있어야 한다는 점이다.
1965년 10월, 베트남 파병을 앞두고 수류탄 투척훈련을 하던 맹호부대에서 강재구 소령(사망 당시 대위)이 부하가 잘못 던진 수류탄에 몸을 덮쳐 산화했다. 누가 시켜서 그런 행동이 나온 게 아니다. 평소 훈련이 돼 있어야 한다. 공직자라면, 지휘자라면 이처럼 마땅한 자리에 굳건히 서야 한다.
공병호 경영연구소장 공병호씨는 18일 이투데이 칼럼을 통해 독문학자 전영애씨의 에세이집 ‘인생을 배우다’를 소개하면서 전씨가 독일에 사는 동안 들었다는 이야기를 전해 주었다. 전씨는 허드렛일처럼 여겨지는 일이라도 “수고하십니다”라고 인사를 하면 독일인들이 “괜찮아요. 이건 제 일인 걸요”라고 대답하곤 했다고 썼다. 사회 구성원 각자가 자기 일이 무엇이며 그것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아는 게 중요하다.
맹자는 “현명한 자가 지위에 있고 능력 있는 자가 직책에 있어 국가가 한가하거든 이때에 미쳐 그 정사와 형벌을 밝힌다면 비록 강대국이라도 반드시 두려워할 것이다”라고 말했다. 현명한 사람과 능력 있는 사람은 다르다. 현명은 통찰력 도덕성 슬기와 통한다. 재능은 행정력 전문성 기술로 이어진다.
재능보다 현명이 필요한 시대다. 사람을 그 자리와 일에 맞게 가려 쓰되 현명한 이를 더 중시해야 한다. 현명한 공인의 아름다운 언행에서 비롯되는 ‘낙수효과’가 사회 전체에 두루 미쳐야 한다. 그런데 우리의 경우 국가는 언제까지나 한가롭지 않고, 총리감 하나도 찾지 못할 정도이니 딱하고 답답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