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벼움을 부추기는 시대에서 다양한 경험을 담은 책은 삶의 무게중심을 다시 확인시켜 주는 기쁨이 있다. 책의 구석구석에는 아름다운 시와 문학 이야기가 소개돼 있는데 이런 것들이 다른 책들과 또렷한 차이를 만들어낸다. 에세이가 그렇듯 손길 가는 대로 펼쳐서 읽으면 된다.
저자의 경험에다 제자들이 인생의 길을 개척하는 것을 지켜보면서 내린 결론은 이렇다. “제아무리 현명한 사람도 진정 자신이 가야 할 길을 찾아 그 궤도 위에 올라서서 자리를 잡는 데 최소한 십 년은 걸리는 것 같다.” 저자는 독일에서 오랜 시간을 보내다 보니 일을 대하는 사람들의 태도에 주목하게 된다. 저자가 독일에서 자주 듣고 감탄하는 것은 세상 기준으로 허드렛일처럼 여겨지는 일조차도 “수고하십니다”라는 말을 건네자마자 돌아오는 답은 정해져 있다는 사실이다. “괜찮아요. 이건 제 일인 걸요.” 저자는 우리 사회에서도 현실인식과 책임감 그리고 자긍심을 듬뿍 담은 “이건 제 일인 걸요”라는 말을 많이 들을 수 있었으면 하는 소망을 피력한다.
아이를 키우는 부모는 자식에게 무엇을 물려주어야 할까. 대문호인 괴테를 ‘뿌리와 날개’라는 두 단어로 요약하는데, 저자는 우리의 현실에 맞게끔 이를 노동과 격려로 해석한다. 내가 보기에는 뿌리와 날개라는 두 단어에는 여전히 귀한 의미가 있다. 언젠가 저자가 학내 소식지에서 괴테의 시 한 편을 소개해 달라고 부탁받았을 때 짧은 괴테의 시를 소개하는데 여기에 저자의 종교관과 인생관이 상당 부분 담겨 있다.
“예술과 학문을 지닌 자/ 종교도 가진 것이다./ 그 둘을 소유하지 못한 자/종교를 가져라.” 괴테다운 학문에 대한 자긍심을 담고 있다. 비판적인 소리를 예상했는지 저자는 “종교를 내리깎는 것이 아니라 학문과 예술을 한껏 높이는 말”이라고 덧붙였다. 학문이 그처럼 사람에게 뒷심을 제공할 수 있는지 생각해 볼 일이다.
오랫동안 학문적 스승이었던 분이 저자에게 해 준 조언도 일품이다. 학회에서 누군가를 조금이라고 공격하게 되면 저자 자신이 무척 힘들어하는 것을 지켜본 스승의 훈수는 이렇다. “너는 왜 누구의 턱을 치면서 동시에 반창고를 붙여 주니? 아가리를 칠 때는 아가리만 치는 게야.” 마음이 여린 저자가 스승으로부터 받았던 초강도 직방 주사라고 말한다.
인간관계마저 날로 단기적 관계로 바뀌는 세상에서 저자가 맺었던 인간관계는 깊고 오래된 것들이 많다. 오랫동안 도움을 받아 왔던 독일인 홀레 씨 부부가 연로해지면서 저자는 몇 해 동안 크리스마스 장식을 위해 뒤셀도르프를 방문하게 된다. 평생 동안 해오던 높은 크리스마스 트리를 장식하는 일을 돕기 위한 저자의 나들이는 감동적이다. 또한 어머니가 돌아가신 후 폐허가 된 독일에 홀로 남은 홀레 부인의 어머니를 찾아온 영국 의사의 딸도 대를 이어가는 인연을 생각하게 한다.
아이를 낳아서 키우는 일이 무척 힘이 드는 세상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자의 이야기는 아이를 낳아서 키우는 일이 어떤 일인지를 말해 준다. “아이를 둔 덕분에 살았다. 아이들에게서 얼마나 많은 힘을 얻었던가. 온갖 어려움을 이겨낼 수 있었다. 언제나 준 것보다는 받은 것이 많았다.” 문장 하나하나에 세월의 무게와 지혜가 담긴 감동적인 에세이다.